2024년 4월 19일(금)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박찬욱 '리틀 드러머 걸', 첩보 멜로의 화룡점정

김지혜 기자 작성 2019.04.28 08:57 수정 2019.04.29 08:30 조회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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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박찬욱 감독은 인터뷰 자리에서 도슨트(docent :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된다. 관람자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가이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태도다. 그와의 인터뷰는 능동적인 인터뷰어가 되지 않더라도 즐거운 시간이 보장된다. 물론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얻는 결과물은 다를 것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스크린이 아닌 안방에서 박찬욱의 작품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이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도전한 드라마다. 첫 도전을 한국도 아닌 영국에서 감행했다.

이 드라마가 박찬욱 감독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은 첩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과거 존 르 카레와 인연이 닿을 뻔했다. 앞서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또다른 영화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의 연출 제안을 받았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지금도 첩보 스파이물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리트

영국 BBC 방송국은 2016년 존 르 카레 원작의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연출 수잔 비에르)를 제작해 비평적, 흥행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 제작자 사이먼 콘웰은 영화감독 수잔 비에르에 이어 존 르 카레 연작 시리즈 2탄이 될 '리틀 드러머 걸'의 메가폰을 박찬욱 감독에게 제안했다.

박찬욱 감독은 존 르 카레의 팬이었지만 1983년 발간된 '리틀 드러머 걸'은 읽지 않은 상태였다. 아내의 추천으로 뒤늦게 책을 접한 후 원작의 힘에 매료됐다.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되어 스파이가 된 배우 '찰리'와 그녀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숨 막히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 스릴러.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의 첩보전을 다루고 있지만 스파이물의 외피를 싼 멜로라는 점이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영국 여배우인 찰리(플로렌스 퓨)는 모사드의 제안으로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리더 미셸의 연인 행세를 하기로 한다. 모사드는 찰리를 실전에 투입하기 전 가상의 무대를 만들어 훈련시킨다. 이 픽션의 세계에서 모사드 요원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미셸을 연기하고 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베커 역시 찰리에게 빠져들어 작전 수행을 앞두고 죄책감을 느낀다. 연극과 현실이 교차하며 두 남녀는 사랑과 작전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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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 계약을 체결한 박찬욱 감독은 영국 런던으로 넘어갔고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독일, 영국, 그리스, 이스라엘, 오스트리아, 레바논 등 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촬영과 편집에 매진했다. 영화 '아가씨'를 68회 차에 걸쳐 완성했던 박찬욱 감독은 '리틀 드러머 걸' 6부작을 81회 차에 완성해야 했다. 완벽주의인 감독에게 시간의 제약은 적잖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독일에 위치한 이스라엘 대사관 관저 폭파 장면으로 포문을 여는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의 인장이 알알이 박힌 작품이다. 완벽한 미장센과 탁월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미술 등 기술적 요소도 훌륭하지만 여성을 중심에 내세운 첩보물로서의 개성과 서스펜스, 멜로 드라마로서의 섬세한 심리묘사도 돋보인다. 특히 매회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문을 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렬한 엔딩으로 닫아 드라마에 최적화된 연출을 보여줬다.

'리틀 드러머 걸'은 6부작까지 정주행해야만 그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회인 6화에 이르러서는 1,2화에서는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진한 여운을 만날 수 있다. 찰리와 베커, 쿠르츠 세 중심 캐릭터뿐만 아니라 제3의 인물들이 선사하는 아련하고 쓸쓸한 정서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리트

Q. 머리카락이 많이 희셨습니다. 이번 작품의 스트레스 탓일까요?

A. 저희 집안이 원래 빨리 셉니다.(웃음)

Q. 언론시사회가 아닌 VIP시사회에서 '리틀 드러머 걸'을 봤습니다. 무대인사에 감독님뿐만 아니라 김우형 음악감독, 조영욱 음악감독도 함께하셨는데 세 분이 함께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더군요.

A. 네. 뿐만 아니라 통역 겸 프로듀서로 촬영 내내 고생을 한 정원조 프로듀서도 함께했지요. 생각해보면 프리 프로덕션 때는 김우형 감독이 있어서 큰 힘이 됐고, 포스트 프로덕션 때는 조영욱 감독이 있어서 덜 외로웠습니다. 시간적으로 쫓기는 상황에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지경에 몰렸는데 덕분에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네요.

Q. 촬영감독과 음악감독을 한국인 스태프로 꾸린 건 감독님의 의사였겠죠?

A. 그렇습니다. 반신반의했던 영국 쪽 심정도 이해는 가요. TV 드라마를 처음 하는 데다 한국 외 국가에서 처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했을 거예요. 제가 만든 영화들을 보면 음악이 좋은 건 알겠는데 과연 작업 날짜를 맞출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더군요. TV 쪽은 음악에 대한 요구가 굉장히 많아요. 영화 쪽에서 온 사람들은 시간을 많이 두고 우아하게 일한다는 선입견도 있더라고요. 어쨌든 조영욱, 김우형 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박찬욱

Q.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인 분쟁이라 민감한 이슈입니다. 왜 영국 BBC가 한국 감독인 박찬욱에게 이 작품의 연출을 맡겼을까라는 궁금증이 들더군요.

A.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은 한국 감독이라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우리 역시 분쟁과 폭력의 악순환, 더 큰 폭력으로 앙갚음하는 역사적 비극을 겪은 민족이니까요.

Q. 이 작품은 지난해 11월 영국 BBC, 미국 AMC를 통해 해외에 먼저 공개됐습니다. 드라마를 본 영국인의 반응,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A. 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영국의 원죄를 묻는 것에 대해 노년층은 싫어하기도 할 테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마치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를 일본 젊은이들에게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죠. '리틀 드러머 걸' 촬영 현장에는 이스라엘 배우, 팔레스타인 배우가 공존했어요. 그 친구들은 이 이야기에 굉장히 감정 이입을 하더라고요. 어떤 친구는 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보수적 입장이었는데 각본을 연구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어요. 또 이스라엘 배우들은 리딩하면서부터 많이 울더라고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작품을 많이 좋아할 거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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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마타 하리 류의 첩보 로맨스 서사가 전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매력에 끌렸나요?

A. 첫 번째로 '쿠르츠'(마이클 섀넌)라는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꼈어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현실로 느껴지게끔 디자인하는 인물인데 그 점이 제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 드라마의 프로듀서, 작가, 감독입니다"라는 쿠르츠의 대사도 제가 만들어 넣었어요. 두 번째 찰리(플로렌스 퓨)라는 사람의 성격에 매료됐어요. 무모하고 저돌적인 여성이잖아요. 특히 사랑에 빠져 용감하게 뛰어드는 그 에너지에 끌렸어요. 그간 제 작품에 복수심에 불타 행동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사랑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고전적 인물은 없었거든요.

Q. 찰리는 남자의 이름을 가졌지만 여성입니다.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여성 서사에 큰 애정을 보여왔는데요. 원작 소설을 읽으며 파악한 찰리를 어떤 인물입니까?

A. 젊은 여성인 데다 혁명의 기운이 살아있는 1970년대의 무명 배우라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배우라는 존재는 감독인 제게 친숙한 인물이잖아요. 배우라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측면을 부각해보고 싶었어요. 무엇이 허구고 실제인지 몰라 혼란을 느끼는 지점이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이 있는 주제가 아닐까요? 이 작품이 첩보물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 순수 문학에 가깝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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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플로렌스 퓨 특유의 에너지가 찰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박찬욱 월드'에 또 한 명의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A. 찰리라는 인물은 책만 읽어도 젊음과 생동감이 느껴졌어요.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젊었을 때는 에너지를 겉으로 발산하는 캐릭터보다는 속으로 침전하는 캐릭터가 성숙해 보이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됐어요. 활기찬 젊음, 청춘의 모습이 좋아요. 찰리는 활기가 있는 만큼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면도 있어요. 그저 좋아하는 남자 하나 보고 이 첩보전에 뛰어든 거죠. 호기심만으로 뛰어든 일치고는 엄청나게 위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죠. 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인물로 변모하게 돼요. 레바논의 테러리스트 캠프에 가서 군사 훈련까지 받고 어느 순간부터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장하죠. 그 일련의 과정을 플로렌스 퓨만의 색깔로 멋지게 구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Q. 찰리 역의 플로렌스 퓨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7)를 보고 캐스팅 한 거겠죠? 베커 역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어찌 보면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는데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 쌀림 역을 연기한 팔레스타인계 배우는 어떻게 발굴했는지도 궁금합니다.

A. 영국에 '아가씨'를 홍보하러 갔을 때 현지 에이전트가 제가 좋아할 거라면서 '레이디 맥베스'를 추천해줬어요. 플로렌스 퓨를 보는 순간 '언젠간 작품에서 만나겠구나'라고 감이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베커 역의 알렉산더의 캐스팅의 경우 제작사에서 조금 우려가 있었어요. 유대인하면 떠오르는 외모와는 거리가 머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인종적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알렉산더는 영화 '스토커'(2013)때 삼촌 찰리 역할로 한번 미팅을 가진 적 있어요. 제가 생각한 찰리보다 젊었기 때문에 인연이 닿지는 못했지만요. 최근 방영된 미국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입니다. 쌀림 역을 연기한 아미르는 팔레스타인계인데 이스라엘에서도 분쟁이 심한 지역 출신이에요. 자라면서부터 민족적 갈등을 흡수한 친구라서 각본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았어요. 영국 정보부 수장으로 나오는 찰스 댄스는 제가 캐스팅을 고집한 경우예요. '에이리언3'(1992)때부터 팬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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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박찬욱의 드라마 같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돋보였습니다. 특히 찰리와 베커가 처음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키스를 하는 아크로 폴리스 장면은 굉장히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느껴졌습니다.

A. 아크로 폴리스 촬영은 그리스 내에서도 국가적 이슈였어요. 어렵게 얻은 기회였죠. 촬영 허가는 물론이고 밤 촬영도 처음이라고 들었어요. 촬영 때야 모든 스태프들이 함께 했지만 사전 답사 때는 저, 촬영 감독, 프로듀서밖에 가지 못했어요. 몇천 년 전 유적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으니 숙연해지고 경건해지더라고요. 촬영은 하루 밤 안에 다 끝내야 했어요. 숙제이자 도전이었죠. 조명도 유적지에 설치된 것만 활용할 수 있었죠. 여러 각도에서 인물을 따고, 드론을 날려 부감 촬영을 하는 등 정신없는 일정이었어요. 로맨틱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담은 신(scene)이기도 해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아크로 폴리스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찰리(플로렌스 퓨)에게 구구절절하게 해요. 맨스플레인(masplain :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여성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에 가깝죠. 유적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찰리는 그걸 가뿐하게 받아치죠. "아크로 폴리스는 아테네를 누가 지배했느냐에 따라 그리스 신전으로도 모스크로도 쓰였고, 마지막에는 로드 엘긴이라는 영국 대사가 가장 중요한 조각(엘긴 마블)을 대영 박물관에 팔아버렸다"는 그 대화는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를 비유하는 말이에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에 거짓말을 한 영국의 원죄를 지적하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이 장면의 정점에 두 사람의 첫 키스가 있지만, 남자는 여자를 이상하게 밀어내고 낭만적으로 보였던 신의 마무리가 어리둥절하게 끝나버려요.

Q. 찰리는 베커에 대한 호감과 사랑으로 스파이 일에 뛰어들게 되잖아요. 두 남녀의 교감의 순간을 묘사하는 연출도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A. 네. 따뜻하고 달콤하게 그리려고 했어요. 이 원작의 좋은 점은 로맨스가 스파이 음모에 있어 하나의 세계로 작용하는 거죠. 낮에는 스파이 활동하고, 밤에는 연애하고가 아니라 이들은 음모 때문에 만나게 된 거예요. 그 자체가 하나입니다. 찰리의 입장에서는 베커를 사랑해서 이 음모에 뛰어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똑같은 옷을 입은 다른 남자를 연기하고 있어요. 게다가 드라마 후반부에 가면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며 관계가 복잡해지기도 해요. 로맨틱한 순간순간을 묘사하지만 그 안에 머물 순 없어요. 항상 씁쓸하고 위험한 상태로 신(scene)이 끝나요. 아크로 폴리스에서 로맨틱한 키스를 하지만 베커는 찰리를 밀어내고, 찰리는 수치심을 느끼죠. 이후 예상치 못한 사건, 인간들과 맞닥뜨리게 돼요. 그렇지만 누구를 탓할 수 없어요. 그건 자신이 베커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지루한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어 선택한 일이니까요. 베커의 입장에서는 찰리를 음모에 끌어들일수록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그만두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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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두 사람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 문제를 넘어 정체성, 신념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등 복잡한 레이어(층)가 형성돼있습니다. 그 점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지만 연출에 있어서는 어려운 점이었을 것 같습니다.

A. 사실 그전에 영화들도 다 로맨스가 중심에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더 중심에 있죠. 베커가 찰리를 유혹하고 이 임무에 끌어들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니까요. 대사를 만들었다가 뺀 것 중에 "허니 트랩(honey-trap)을 위한 허니 트랩(honey-trap)이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해석하면 '미인계를 위한 미인계'라는 뜻이죠. 베커가 찰리를 유혹하는 건 그녀를 테러리스트의 애인으로 만들어 조직에 침투시키기 위해서니까요. 시청자들은 '어디까지가 진심일까'를 의심하면서 보게 되지만 멜로가 중심인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사랑이 좀 더 전면에 드러나요. 베커와 찰리가 첫 섹스를 하기까지는 모든 게 다 진심으로 보여요. 작전에서 손을 떼려는 여자를 붙잡기 위한 연기처럼 보이지 않아요. 어디까지가 작전이고, 진심인가가 계속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드라마는 찰리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베커가 주인공이기도 해요. 베커는 찰리를 테러리스트의 애인으로 만들기 위해 테러리스트를 연기해요.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투, 행동, 태도까지도 그 인물에 빙의해 가죠. 그런 점에서 베커도 찰리와 마찬가지로 배우 못지않은 사람이에요. 이 드라마의 진짜 재미는 스파이야말로 연기자들이란 것이에요. 이게 원작의 큰 매력이죠.

Q. 방대한 원작을 6부작에, 그것도 81회 차에 완성해야 한다는 건 엄청난 도전이자 부담이었을 것 같습니다. 시행착오는 없으셨나요?

A. 6부작을 81회 차에 찍었다고 하니까 친한 이경미 감독이 자기가 찍는 넷플릭스 드라마('보건교사 안은영)는 회차가 더 적다고 하더라고요. 그 드라마야 한 나라에서 찍는 거고, 우리는 몇 개국을 돌며 찍었으니까 다르지!(웃음) 다행히 준비를 꼼꼼하게 해서 큰 시행착오는 없었어요. 다만 "이건 절대 못 찍어"라고 지적받은 신(scene)이 몇 개 있었어요. 이 신들을 찍으면 스케줄을 초과하게 될 테고, 만약 찍는다면 전체를 대충 찍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는데....결국 다 해냈어요. 대표적으로 1화에 첫 등장하는 안나를 3화에 체포하는 롱테이크 액션 신과 6화의 후반부 모사드 요원들이 칼릴 조직의 관련자를 하나씩 암살하는 시퀀스예요. 여러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찍기 어려울 것이라 했는데 기어이 해냈죠.(웃음)

더 리틀

Q. 원작자인 존 르 카레가 '나이트 매니저'에 이어 또 한 번 카메오 출연을 합니다. 어떻게 성사된 건가요?

A. 존 르 카레의 맏아들 사이먼 콘웰이 이 작품의 제작자예요. 그가 나에게 와서 "아버지한테 출연을 부탁하면 못 이기는 척 하실 것"이라고 귀띔을 하더라고요. 다만 너무 긴 대사를 줘서는 안된다고 해서 짧게 출연을 부탁했습니다.

Q. 충무로에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에 가서 독립영화('스토커')를 만들고, 영국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등 끊임없이 도전하는 행보가 놀랍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A. 좋은 소재와 이야깃거리를 개발하고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제한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언어의 제한, 장소의 제한, 배우의 제한도 그렇고요. 존 르 카레 소설을 읽었는데 너무 좋았던 거죠. 제가 한국에만 갇혀 있다면 어땠을까요? '이걸 한반도로 옮겨서 해볼까?'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물론 '핑거스미스'('아가씨'의 원작인 영국 소설)의 경우처럼 일제 강점기로 바꿔 '아가씨'로 만들 수도 있지만 어떤 작품은 원작 그대로의 배경과 설정이 좋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지금과 같은 도전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Q. 요즘 화두인 '넷플릭스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앞서 '도끼'(AX)라는 작품을 넷플릭스와 논의하기도 하셨는데요.

A. 여전히 고민이죠. 영화화하기에는 긴 시리즈고 극장을 희생해도 그 대가가 충분한 스토리라면 TV나 OTT(Over The Top :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가 좋은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마틴 스콜세지(신작 '아이리쉬 맨'을 넷플릭스 자본으로 제작)처럼 자신이 하려는 영화가 예산이 너무 커 기존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투자 판단으로 제작이 어렵겠다 싶으면 넷플릭스와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극장을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 넷플릭스 영화들은 일부 극장에서 상영을 하기도 하니까 다행이죠.(웃음)

박찬욱

Q.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두터운 팬덤이 있습니다.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은 한국 영화를 언급할 때 아직도 '올드보이'(2003)를 최고작으로 꼽기도 하고요. '박찬욱스럽다'라는 말은 하나의 관용어가 된 듯한데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떠신가요?

A. 할리우드 배우들은 말은 그렇게 하는데 막상 시나리오를 주면 거절해요.(웃음) 늘 작품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일관된 스타일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저의 한계인 것 같아요. 물론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사는 건 아니지만 개별 이야기나 주제, 캐릭터에 어울리는 형식을 찾아서 적용해 왔거든요. 하지만 애초에 선택한 이야기 자체가 한 사람의 관심사고, 그 폭이 어느 정도 제한이 있으니까 비슷한 색깔로 보이는 거겠죠.

Q. 차기작으로 미국 서부극인 '브리건드 오브 래틀클릭'(The Brigands of Rattlecreek)이 거론되고 있고, 매튜 매커너히 캐스팅 설도 불거졌습니다. 현재 어디까지 진행이 됐나요?

A. 제안을 받은 건 맞는데 투자 확정이 안 된 상태예요. 시나리오는 유능한 각본가이자 뛰어난 감독이기도 한 S. 크레이그 찰러가 쓰고 있어요.

Q.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 왓차 플레이를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선택할 시청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1화에 그리스 해변에서 만난 찰리와 베커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나와요. 찰리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 막대기를 어디에 버릴지 몰라할 때 베커가 자신의 주머니에 스윽 넣어요. 저는 그런 베커처럼 항상 여성을 살피고 뭘 해줄 게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더불어 찰리가 혼자 막 수다를 떨고 그런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베커에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네요? 그 높은 데서 잘 들려요?"라고 위트 있게 말하죠. 저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재밌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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