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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찐리뷰

[꼬꼬무 찐리뷰]"아기를 삶아 먹었다?" 괴담 퍼질 만큼 처참했던 '8.10 성남항쟁'의 숨겨진 비극

작성 2026.08.2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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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7일 방송된 '그림자 도시-1971 광주대단지 사건'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남규리, 배우 윤병희, 이광기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공포의 괴담

혹시 이런 괴담 알아? 가난한 집에 홀어머니와 사남매가 살고 있었대. 너무 가난해서 맨날 수제비나 멀건 국수 같은 것만 먹었어. 장남의 소원은 단 하나였어. 고깃국에 쌀밥 한번 먹어보는 거였다고 해.

그러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가마솥에 고깃국이 펄펄 끓고 있는 거야. 장남과 동생들은 허겁지겁 고깃국을 먹었어. 그리고 배도 부르겠다, 눈이 절로 감기는데… 뭔가 이상해. 엄마가 그 음식을 차려놓고 지켜보고 있는 거야.

"엄마… 근데 막내는 어디 갔어?"

이런 괴담이야.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얘기지만, 한때 대한민국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는 공포의 도시가 있었다고 해. 오늘은 그날의 이야기를 해볼 거야. 지금 바로 시작할게.

▲ 버스에서 만난 괴한들

때는 1971년 8월 10일. 여기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이야. 20살 이영성 씨는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어. 그런데 걸음 속도가 예사롭지 않아. 거의 축지법 수준이야. 이유는, 버스를 한 번 놓치면 언제 올지 기약을 할 수가 없거든. 그때는 배차 간격이 지금처럼 잘 돼 있지 않았어. 게다가 이 날 따라 비까지 엄청 쏟아져. 서두를 수밖에 없겠지.

운이 좋게도 오래 지나지 않아 버스가 도착해. 버스문이 열리고 계단을 오르는데, 분위기가 묘해. 원래대로라면 발 디딜 틈이 없을 버스 안이 한산한 거야. 뭐지? 싶은 그 순간!

"빨리 밟으라고! 안 들려?"

젊은 남자들이 버스 기사를 협박하고 있어. 강목까지 든 채로 말이야. 당시 영성 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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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서 보니까 이제. 그 몽둥이를 들고 문지기가 하나 있더라고요. 하여튼 저쪽에서부터 다른 데서부터 그렇게 해서 온 것 같아요. 버스 기사를 인질로 잡고 '여기'까지 가자…"

-이영성, 당시 경기도 광주군 주민

'여기'는 바로 청와대였어. 1971년 버스 기사를 인질 삼아 청와대로 가자는 남자들. 어떤 사람들일까? 답은 조금 이따 알려줄게.

다행히 목적지만이 관심사였던 이 남자들. 승객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아. 잠시 버스가 정차하면서 문이 열린 순간, 영성 씨와 다른 승객들은 잽싸게 버스에서 내렸어. 그러니까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거지. 그런데 이날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동네에 돌아와 보니까 상황은 더 심각해.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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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난 건물의 유리창 밖으로 연기가 치솟고, 차량은 전복되어서 불타고 있어. 심지어 지켜보는 사람들의 손에는 흉기까지 들려있어. 이 날의 상황을 알려면,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해.

▲ 판자촌 사람들

2년 전인 1969년, 한 남자가 서울 남산을 오르고 있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 정재택. 올해 만 21살. 그런데 나무상자를 맨 재택 씨의 뒤를 아까부터 동네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녀. 재택 씨 뭐하는 사람일까?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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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바로 밑에 OO생명 있는데 바로 거기에 한O당 께끼가 있었어요. 아이스께끼. 돈 200원 보증금 걸면 그러면 께끼 한 50개고 100개 가지고 팔러 나가잖아요. 하루에 남산을 한 4, 5번씩 올라갔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러면 서울역에 줄 서서 그 아이스께끼 가만히 팔라고 갔다가 통 뺏기기도 하고 그런 생활을 했어요."

-정재택, 당시 서울 창천동 거주

재택 씨는 남산 일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있었어.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 재택 씨. 그에게 아이스크림 장사는 고되지만 소중한 일자리였다고 해. 사실 이 무렵에 일거리를 찾아서 서울에 온 사람은 재택 씨뿐만이 아니었어. 당시 1960년 서울 인구 244만여 명이었어. 그리고 8년 후인 1968년에는 약 440만 명. 그러니까 8년 새에 두 배 가까이 인구가 늘어난 거야.

한정된 공간에 사람이 많아지면 뭐가 부족할까? 일자리와 집이겠지. 그러면 1969년도 서울의 주택 보급률.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54.2%였어. 그러니까 둘 중 하나는 내 집이 없다는 얘기야. 친척 집에 얹혀 살거나 셋방살이를 해야 돼. 그런데 연고도 없고 셋방도 못 얻었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저 같은 경우는 서대문구 창천동 연세대 입구에서 신촌역 사이에, 거기 판자촌이 엄청 컸어요. 14~15평에 두 세대씩 살았어요."

-정재택, 당시 서울 창천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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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씨는 무허가 주택, 일명 판잣집을 짓고 살았대. 지금 생각하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고 해. 이 시기 서울시내 전체 주택의 30% 이상이 무허가 주택이었거든.

합판이나 폐목재로 외벽을 세우고 지붕에는 방수포와 비닐을 얹은 집. 이런 판잣집에 살았던 사람 중엔 국민학교 6학년, 동연이도 있었어. 이 사람, 너도 아는 사람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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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도에 그해 여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가세가 아주 기울어서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게 됐습니다. 나무와 베니아(얇은 합판)로 막은 정도의 하코방(상자 모양) 같은 집이었고요. 집에는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바로 그냥 천으로 대소변을 눌 정도였고요. 어려운 사람도 있었지만 그 어려운 사람 중에도 청계천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어려운 사람에 속했습니다."

-김동연, 당시 청계천 판자촌 거주, 前경기도지사

먼 훗날 경기도지사가 될 동연이가 할머니, 어머니, 세 동생과 살던 곳도 바로 이 청계천 판자촌이었던 거야.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바람만 불어도 집이 휘청해. 냉난방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화장실이 없는 것도 그냥 당연했대. 게다가 판자촌에선 이런 일까지 있었다고 해.

여긴 서울 성동구 마장동. 16살 상복이네 여섯 식구가 사는 집이야. 하루는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새어 들어와. 동네에서 불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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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새벽에 화재가 나가지고, 사방에서 '불이야!' 소리 지르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어머니하고 다 일어나서뛰쳐나왔죠. 동생들하고. 그때 다들 울고 난리지. 애들이고 어른이고. 살림살이 하나 건지지도 못하고. 옷 하나 못 건지고 나갔으니까."

-송상복, 당시 서울 마장동 판자촌 거주

정신없이 집 밖으로 대피한 상복이와 가족은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고 해. 근데 문제는 집이었어. 그 다닥다닥 붙어있던 그 집들. 다 타버렸어.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어. 이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353가구. 1,800여 명이였어.

▲ 광주대단지 이주 계획

그런데 말이야. 남산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재택 씨와 청계천에 살던 국민학교 6학년 동연이, 마장동 화재를 겪은 상복이. 이들은 몇 달 간격으로 같은 지역의 주민이 돼. 바로 '광주대단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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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 일대. 당시 주소지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이곳은 대한민국 신도시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소야.

광주대단지는 1966년 취임한 제14대 서울특별시장의 손에서 탄생해. 그 이름은 김현옥. 그에게는 '불도저'라는 별명이 있었어. 추진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번 계획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야. 그러다 보니 그의 안전모엔 이런 글자까지 써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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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 취임 이후에 그는 놀라운 속도로 서울을 바꿔나가기 시작했어. 북악스카이웨이 알지? 김 시장이 만든 거야. 삼일 고가도로, 남산 1, 2호 터널을 뚫은 것도 김 시장이야. 다시 말해서, 지금 서울의 밑그림을 그렸던 인물이 김현옥 시장이었던 거야.

그중에서도 불도저 김 시장이 특히 주목한 곳이 있어. 바로 판자촌이야. 사실 여기엔 결정적 계기가 하나 있었어. 1966년 10월에 우리나라에 미국 존슨 대통령이 찾아왔어. 박정희 대통령 취임 이래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찾은 건 이때가 처음이야. 그러니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전 세계에 보여주는 무대로,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지. 존슨 대통령의 방안 당일을 임시 공휴일로 정한 박정희 정권은 기념 우표를 만드는가 하면 약 200만 명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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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사적인 순간은 해외에서도 생중계가 됐어. 그런데, 한 외신 기자의 눈에 의아한 장면이 들어와. 서울의 중심, 시청의 맞은편에 있던 판자촌이었어. 대한민국 수도의 민낯이 전 세계에 전해진 거야.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했을까? "싹 다 정리해"라고 명령했어. 그러자 다음 해, 김현욱 시장은 어마어마한 계획을 발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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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을 서울 바깥 외곽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둘째. 불량 건물을 고쳐 쓴다.

셋째. 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공동아파트를 지어서 철거 이주민들을 이주시킨다.

여기서 김 시장이 특히 주목한 건 1번, 철거민 집단 이주 계획이었어.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었어. 먼저 한 가구당 최소 20평씩의 땅을 저렴한 가격에 분양을 하겠다고 해. 당장 목돈이 없어도 괜찮아. 입주 4년차부터 3년간 나눠내면 되거든.

또 도시 하면 인프라가 있어야지. 학교, 시장, 병원, 극장, 같은 문화시설을 갖추는가 하면,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공업 단지까지 만들겠대. 무엇보다 이 신도시 주민들이 누릴 부동산의 가치는 약 35만 원 상당이 될 거래. 당시 하급공무원 월급이 만 원 남짓이었거든. 3년치 공무원 연봉에 가까운 돈이야. 다시 말해서 이건, 판자촌을 떠나서 집과 일자리까지 얻을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야.

▲ 광주대단지의 현실

1969년 10월 30일 밤. 지금 재택 씨가 사는 서울 창천동에 대형 트럭들이 줄줄이 들이닥쳐. 대대적인 광주대단지 이주가 시작된 거야. 그들 중에는 재택 씨, 동연이, 상복이가 있었어. 재택 씨네 가족들과 온 동네 사람들은 이렇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광주대단지행 차량에 몸을 실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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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군용 트럭, 누군가는 삼륜차, 심지어 다른 누군가는 청소차를 타야 됐대. 마치 짐짝처럼 말이야. 이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기대 반 걱정 반, 이주민들은 낯선 동네에 발을 내디뎠어. 인솔하는 사람의 손끝을 따라 쓱 고개를 돌린 사람들. 이 순간 말을 잃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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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을 떠나왔더니 천막촌이야. 들었던 것과 달리, 난민수용소가 따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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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가니까 벌써 철거민들 간다고 천막을 다 쳐놓고 거기서 배당을 한 거예요. 잔디만 걷어 없앤 데라. 하수 시설도 안 되고 수도도 안 들어왔어요."

-정재택,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계획 때 말했던 공장, 시장, 극장은 고사하고, 가스, 전기, 수도 뭐 하나 놓인 게 없어. 기반 시설이 아예 없는 거지. 이주민들은 여기서 어떻게 살겠나 싶다가도, '판자집 생활도 견뎠는데 여기서라고 못 살 게 뭐야'라며 희망을 품고 버텨보기로 했대. 무엇보다 이 천막은 임시 거처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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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 한 네 가구를 같이 살게 했어요. 그럼 네 가구가 간단한 가재 같은 것으로 칸을 막아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김동연, 광주대단지 이주민

"아침에 세수는 밑에 계천에 가서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거기서 배급을 줬어요. 밀가루 배급을 줘서 그릇 몇 개는 적십자에서 나와서 주고요. 거기다 수제비 해 먹고 칼국수 해서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송상복, 광주대단지 이주민

이런 생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 서울시 성남출장소 직원이 이주민들을 찾아와.

"내일 입주지 배정이 있으니까요. 성남출장소로 나오십시오."

드디어 약속대로 그 땅을 나눠주겠다는 거야. 방식은 뽑기야. 아파트 동호수 추첨과 비슷한 방식이야. 어딜 뽑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20평 남짓의 땅을 얻었다고 해. 그럼 마침내 내 땅을 얻게 된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너무 행복했겠지.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돼.

▲ 극한의 가난, 심지어 '인육 괴담'까지

땅을 저렴한 가격에 준다고 했지, 집을 지어준단 말 한 적 있어? 없어. 사실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사람들 대부분은 하루 벌어 하루 먹던 사람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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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모자라서 나무 사다가 지붕을 기와로 하고, 그런데 대문을 못 달았어요.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돈이 없는 사람들은 거기다 그냥 천막 지고 살았어요. 우리랑 같이 간 이주민은 시멘트 블록 살 돈이 없어서 그냥 4식구인데 천막 지고 살았어요."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땅을 싸게 준다 해도 당장 집 지을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거야. 그러니 어떻게 해. 임시 거처였던 천막에 쭉 살면서 건축비를 모아야겠지. 그럼 광주대단지에 마땅한 일자리 있었을까?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만보 떼기 같은 일이 전부였어.

땅을 개간하다 보면 흙이 나올 거 아니야. 그걸 손수레에 담아서 한 짐씩 나르면 관리인이 종이에 도장을 찍어줘야 돼. 그 종이 이름이 '만보'. 그렇게 도장을 채우면 품삯과 바꿀 수 있었던 거야. 일종의 쿠폰이지. 하지만 만보를 걸어서 만보 떼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 아무리 열심히 흙을 날라도 이걸로 뭐 생활조차 안 되는 거야.

당시에 쌀 반가마가 5천 원이었거든. 그런데 이 만보 도장 하나는 10원 이였어. 만보 떼기 500번을 해야 쌀 반가마를 사는 거야. 다시 말해서 광주대단지 안에는 제대로 된 일거리가 없었다는 거야. 그럼 당연히 다른 데서라도 일자리를 찾아야겠지. 역시 또 서울이었어. 그런데 서울에 오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이 무렵 광주 대단지에서 을지로 5가까지 버스로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요금은 시내버스보다 두 배 정도 비싼데 자주 다니지도 않아. 소형 버스를 다 합쳐도 하루 9대가 전부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서울에 직장이 있던 사람들도 일을 그만둬야 했대.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시련은 끝나지 않아. 오히려 더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어.

1970년 8월이 되면서 광주대단지 인구는 더 늘어나게 돼. 무려 4만여 명이 됐어. 엄청나게 커진 거야. 그럼 이곳의 공동수도 몇 개였을까? 우물을 포함해서 78곳이 전부야. 사람들은 무거운 물지게로 물을 날라야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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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이 아니야. 상하수도 공사는 아직 착공조차 안 됐지. 분뇨처리는 수거 대책조차 없어. 오물은 넘치고 물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일까지도 벌어졌대.

"광주대단지의 대장염이 집단적으로 발생."
"281명이 3일까지 5일째 앓고 있다. 지난달 30일에 내린 비로 더러워진 웅덩이의 물을 그대로 마신 뒤, 설사와 열이 나며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밖의 주민들도 피부색마저 까맣게 변색되고 이질 증세의 병을 앓고 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이곳에 제대로 된 병원이 있었을까? 없지. 보건소가 있긴 하지만 환자들이 몰려드니 늘 의약품이 부족해. 영양실조, 피부병, 이질을 앓는 사람들이 언제나 넘쳐나. 그러다 보니까 언젠가부터 광주대단지 안엔 이런 괴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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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배고파서 아기를 삶아 먹었다고 그런 소문을 못 들었어요? 그 소문이 아주 파다했었어요. 산모가 먹을게 없어서 배고파서 자기 애기를 삶아 먹었다고. 그게 아주 파다했었다고."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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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가 혼자 아이를 낳고 사람들이 와서 솥을 보니까 뼈다귀만 남았더라는 거예요. 아이를 삶아서 먹은."

-이영성, 당시 경기도 광주군 주민

배고픔에 인육을 먹었다는 잔혹한 얘기는 광주대단지에서 나온 이야기였어. 그럼 이 괴담 진짜일까 뜬 소문일까? 그 괴담의 진실 조금 이따가 알려줄게.

▲ 각자도생 도시계획과 와우아파트 참사

그런데 이 판자촌을 정리하겠다면서 야심차게 광주대단지를 기획했던 김현옥 시장. 그는 왜 허허 벌판에 사람부터 이주시켰던 걸까? 그의 생각은 이랬대.

"사람들은 원래 한 10만 명 정도 모아놓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뜯어먹고 살아가는 법이오."
-김현옥 시장

그야말로 각자 도생.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거야. 이 잔인하고 안일한 논리로, 선 이주 후 건설의 자급자족도시가 탄생한 거지.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야. 김현옥 시장이 기획한 불량 건물 정리 계획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아.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건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서였어. 멀쩡히 서 있던 아파트가 무너져버린 거야. 건물이 붕괴하면서 그 아래에 있던 판자집까지 덮쳐. 총 33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진 거야.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참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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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건물 정리 계획 중 세 번째. '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공동 아파트를 지어서 철거 이주민들을 입주시킨다' 철거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와우 아파트는 지상 5층 15개동 규모였어. 당시 기술로 이걸 짓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단 6개월. 건물이 무너진 건 입주 넉 달 만이었어.

더 기가 막힌 건, 붕괴 이유야. 조사를 해보니 철근 70개가 들어있어야 할 기둥 안에 철근 5개가 들어갔어. 엄청난 부실 공사지. 결국 이 일로 김현옥 시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어. 대한민국 최초의 순살 아파트를 기획했다는 오명을 안고서.

자, 그럼 광주대단지는 어떻게 됐을까? 1970년 여름, 참다 못한 주민들이 하나 둘 광주대단지를 떠나기 시작해. 그러다 보니 서울의 판자집은 이주 계획 때보다 5만 채가 더 늘어났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 거야. 김 시장의 불량 건물 정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거지. 게다가 이 무렵부터 광주대단지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 부동산 투기 광풍과 과장 홍보

철거 이주민들이 떠나면서 팔고 간 게 있어. 일명 '딱지'라 불리는 분양증이야. 분양증을 사고 팔면서 광주대단지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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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선 이 광주대단지를 둘러싼 장밋빛 전망이 새어나오고 있었어.

"저기, 들어봤어? 그 광주대단지에서 딱지라는 걸 사면 20평씩 땅을 받을 수 있대."
"좀 멀긴 해도 서울에서 출퇴근도 된다던데?"

안에서는 지금 생존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 밖에서는 이 광주대단지를 기회의 땅으로 여겼던 거야. 서울시에서 광주대단지를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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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중사는 아저씨를 뵈려고 광주재단지로 떠났습니다."

"개척이라는 글자 그대로 입구에서 이미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아저씨 가신 곳을 물으니 새로 세워진 전자기기 공장에서 지금 근무 중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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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구경을 하면서 아저씨의 말씀을 들으니 수도, 전기, 그 외 여러 가지 문화시설도 갖추어 졌으니"

"1973년 완공되면 이 광주대단지는 총면적 350만 평에 인구가 35만이 되고 공장이 100여 개에 고용인구 5만여 명이 되는 지금의 대전시만한 산업도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광주대단지 홍보 영상 中

이 홍보 영상을 보면 혹할 만 해. 광주대단지가 잘 만들어진 계획 도시 같아.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광주대단지엔 부동산이 우후죽순 생겨나. 그때는 복덕방이라고 했지. "지금 계약 안 하면 다 놓친다, 여기가 제2의 서울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라는 감언이설로 부동산 계약을 유도해.

오늘 얘기 시작할 때. 버스에서 괴한을 만났던 영성 씨 기억하지? 사실 영성 씨도 처음엔 집도 땅도 없이 소문만 듣고 광주대단지로 이사를 왔었대. 그런데 여기서 살다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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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복덕방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게 하도 많고 관심이 있다 보니까 매일같이 들러봤어요 여러 군데를. 하루 갈 때마다 계속 올라가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0원씩 올라가, 100원씩. 그래서 형 없는 사이에 어머니 졸라서 시골에 있는 집, 논, 산, 밭 전부 팔자고 해서. 싹 팔아서 여기서 땅을 샀죠."

-이영성, 광주대단지 전매 입주자

사실 내 집을 갖고 싶은 마음이야? 너무 이해가 되지. 집이 없으니까 영성 씨는 더 그 마음이 간절했대. 그래서 10만 원을 주고 20평짜리 땅을 샀다고 해. 당시 철거 이주민이 분양받은 땅값이 평당 1800원이었거든. 3배 가까이 웃돈을 준 거야. 그래도 내 터전이 생겼다는 생각에 영성 씨는 마냥 행복했대. 무엇보다 땅값이 계속 올랐거든.

▲ 폭탄 고지서와 비극적 겨울

이런 가운데 광주대단지의 부동산 시장을 더 달아오르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어. 바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야.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 차지철 의원의 공약은 이랬다고 해.

"건설 사업 2년 이내에 완성시키고, 토지도 공짜로 쫙 다 나눠주고. 세금도 5년 동안 없애겠습니다."

엄청난 공약이지. 주민들의 지지에 차지철 의원은 당선이 됐고 이제 광주대단지는 미래를 향한 유토피아로 여겨질 정도야. 그런데 1971년 7월 14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에게 느닷없는 내용의 통지서가 날아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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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서>

"전매 입주자들에게 토지 20평을 평당 8천 원에서 1만 6천 원씩 불하하며 대금은 일시불로 7월 말까지 상환하라. 만약 계약 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 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겠다."

서울시에서 지금 분양권 거래를 전면 금지했어. 영성 씨처럼 철거 이주민에게 분양권을 산 사람들에게 분양가의 약 4배에서 8배의 돈을 내라고 한 거야. 보름 뒤까지. 그것도 일시불로. 20평이라고 해도 최소 16만 원이잖아. 하급 공무원 연봉보다 큰 돈을 보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게다가 땅 살 때 이미 돈을 냈잖아. 그거 낸 거 빼고 또 이렇게 내라는 거야. 땅값을 지금 두 번 내게 생긴 거야. 만약 상환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대.

더 기가 막힌 건 이 땅을 서울시가 사들일 때 가격은 평당 120원에서 400원이었어. 그러니까 거의 67배를 더 내라는 거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투기가 아니라 정말 내 집을 갖고 싶었던 소시민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대.

전매금지 조치에 막막해진 건 철거 이주인들도 마찬가지였어. 아까 보여줬던 분양증. 거기 뒷면에 독소 조항이 적혀 있었거든.

"본증은 분양지 배정을 받고 30일 이내에 입주 정착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고 그 분양지는 타인에게 분양됩니다."

한 달 안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무조건 집을 지어야 되는 거야. 주민들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화가 나지. 무엇보다 땅값만 올랐을 뿐이지 주민들의 생활은 달라진 게 전혀 없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어.

여긴 광주대단지 재택 씨의 집이야. 늦은 밤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서 문을 열어봤더니, 젊은 부부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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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저만해서 그 집 애가 100일이 지났는데 갑자기 또 죽었다고. 두 내외가 그냥 울고만 있는데. 그래서 합판으로 관을 짜서 손수레에 싣고 가서 밤에 가서 파묻고. 심정이라 하면 현실이 그러니까. 애가 100일 막 지난 놈이 죽었으니까."

-정재택,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재택 씨는 장례 치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일을 도왔대. 1970년 겨울에 광주대단지엔 여전히 천막과 판자집에 사는 사람들이 전체의 13% 정도였어. 이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계절은 겨울이였어.

"비닐누더기 천막 속 한파에 떠는 광주단지. 광주대단지에 옮겨진 이주자 1천여 가구가 비닐이나 누더기 천막 속에서 한파에 떨고 있는가 하면, 겨울철 일거리가 없는 등 딱한 생활을 하고 있어, 첫 추위가 닥친 지난달 28일에는 탄리 A블록 비닐 천막 속에서 부 씨의 세 살배기 아들이 한파에 떨다 원인 모르게 숨졌는데. 가족이나 이웃에선 동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이 무렵 서울시가 월동대책이라고 주민들에게 나눠준 게 있었거든. 볏짚 6천 다발, 가마니 3천 장, 천막 3백장을 준 거야. 이 볏짚을 덮고 가마니 깔고 천막을 두르고. 그리고 버티라는 거지.

이렇게 병 들고 얼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사이, 인육 괴담은 더욱 살을 더해갔어. 산모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설부터, 언론사에서 현상금 1만 원을 걸고 제보를 받고 있다는 얘기까지 퍼졌지. 그러면 진실은 뭐였을까? 이건 경기도에서 작성된 '성남지구 대책 추진 현황'이야.

"이 씨는 행상으로 생활을 유지하여 오던 중 임신으로 행상을 중지. 국수로 연명하다가 7월 26일 남아를 분만. 71년 8월 2일 오전 4시 산모 사망. 주민들 사이에는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유포되고. 동 사실이 세간에는 산모가 배가 고파서 아이를 뜯어먹었다는 소문이 와전됨."

괴담은 괴담일 뿐이었어. 한 산모의 안타까운 죽음이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부풀려진 거지. 그런데도 괴담이 파다하게 퍼진 그 이유는 뭐였을까? 사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면 애초에 얘기가 퍼질 일은 없었을 테지. 점점 괴담이 퍼졌다는 거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일 정도로 당시 상황이 너무 처참했다는 거야.

주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대. 그래서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조직을 만들어. 이름하여 '토지불하가격 시정 대책위원회'. 이들의 요구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어.

첫째, 영세민들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고 긴급 구호 양곡을 제공해달라. 둘째, 땅값은 내겠다. 대신 책정한 금액이 너무 비싸니 평당 가격을 낮추고 일시불이 아닌 분할로 내게 해달라.

그리고 1971년 7월 24일. 이들은 15,000가구의 서명을 받은 결의문을 서울시와 경기도청에 보냈어. 어떤 답이 왔을까? 답이 없어. 오히려 8월 1일 경기도에서 또 하나의 고지서가 날아들어. 등기조차 안 된 집에 취득세를 내라는 거야. 거의 뭐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지. 결국 주민 대표들은 투쟁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주민 궐기 대회를 통해서 뜻을 전하기로 결정했어.

▲ 분노의 궐기대회

D-Day는 1971년 8월 10일. 하루 전부터 광주대단지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성남 출장소에 뒷산으로 모이라는 전단지 3만 장이 뿌려졌고, 대책을 요구하는 현수막과 포스터가 곳곳에 붙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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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 가격, 결사 반대한다."

상황을 주시하던 성남 출장소 소장은 다급히 시 본청 주택관리관에게 연락을 했어. 결국 8월 9일 밤 8시 무렵 최종완 부시장이 부랴부랴 주민 대표들과 협상이 나서. 그런데 주민들의 민원을 듣던 부시장이 예상치 못한 얘기를 해.

"아니 누가 당신들한테 여기 와서 살라고 했소? 나가면 될 거 아니오."

광주대단지에 올 때 떠밀려 오다시피 했던 철거 이주민들이야. 어디로 가는지 설명조차 못 들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지. 쫓겨난 거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싫으면 떠나라니. 결국 회의는 대책 없이 끝나고 말았어. 대신 한 가지는 결정돼. 다음날 오전 10시에 양택식 서울시장과 직접 단판을 짓자는 거였어.

그리고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운명의 날. 큰 비가 쏟아질 듯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해. 그런데 새벽부터 광주대단지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어.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오전 10시까지 성남출장소 앞으로 모두 나오십시오."

마이크를 든 사람은 당시 광주대단지에서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던 유협종 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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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택시를 불러서 제가 돈을 주기로 하고 마이크를 달고 가두 방송을 나갔죠. 그날 아침에. '백 원에서 산 땅 만 원에 팔지 마라! 시민들이여 궐기하라!' 마이크 가지고 방송을 하니까 주민들이 골목골목 있다가 막 터져나오기 시작을 했거든요. '와!' 소리 지르고 난리 나고 뛰쳐나왔죠."

-유협종, 당시 광주대단지 청년위원장

가두 방송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 모여든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성남출장소 앞마당은 물론, 뒷산 간선도로에까지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 그렇게 사람들이 10명, 20명 점점 늘어나는가 싶더니, 장난이 아니야. 그날 현장의 사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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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모인 사람들의 수는 최소 3만 명. 구름 떼 인파가 울분을 안고 뛰쳐나왔어.

"배고파서 못 살겠다! 실업군중 구제하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반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친 주민들은 양택식 서울시장이 오기만을 기다려. 그리고 오전 10시, 약속 시간이 됐어. 양 시장은 도착하지 않았어. 어느새 1시간이 흘러가는데 여전히 양 시장, 그림자도 안 보여. 그런데 바로 그때, 공교롭게도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길은 펄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데, 짜증이 절로 나. 그렇게 약속 시간 70분이 넘어갈 무렵,

"아니 무시를 해도 유분수지! 우리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격분한 주민들 중 일부가 서울시청 소속 차량을 개천에 밀어넣고, 성남출장소에 들어가 내부기물을 박살내기 시작한 거야. 당시 현장엔 경향신문에서 근무하던 이보택 기자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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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에서 취재 지시를 내리면서 현장을 취재하라 그러길래, 현장에 도착해보니까 시청 바로 앞에 주민들이 한 몇 백명이 집단으로 몰려있고. 서울신문 차량도 불타고, 경찰차도 불타고. 경찰관, 전경들이 그 밑에 집결이 되는데. 악몽이지 악몽. 악몽으로 기억되는 거예요. 떠올리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어 사실은."

-이보택 당시 경향신문 기자

광주대단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이보택 기자는 신분을 알리는 프레스 완장을 차고 있었대. 하지만 이 분노한 주민들 앞에서 이 기자는 쓱 눈치를 보고 완장을 빼. 자신들이 정부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경찰이나 언론도 믿지 않았거든. 12살 아이마저 자기 키보다 큰 몽둥이를 들고 나와 울부짖는 상황에서, 일부 주민들은 버스에 올라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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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시장이 안 온다면 우리가 대통령 만나서 얘기를 하면 될 거 아니야?"

이들의 목적지는 청와대였어. 이야기 초반에 영성 씨가 버스에서 만났던 사람들, 주민들이었어.

"친구들끼리 모여 있는데 '야 지금 그냥 난리 났다. 사람들 들고일어나서 난리 났다' 그래서 가게 된 거죠. 가니까 그냥 버스에 사람들이 올라타고 몽둥이 들고 버스로 뺏어서 '무조건 서울로 가자' 지붕까지 올라가고 그랬었죠. 거기에 고개를 넘어가니까 저쪽에 벌써 경찰들이 경원대(현 가천대) 남문 지나서 몇 겹으로 진을 치고 있는 거예요. 몇 백 명이 우리 못 나가게."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오후 2시 무렵 정부는 경찰 기동대 700명을 투입해. 서울에 가야겠다는 주민들과 못 간다는 경찰의 대치는 한참 동안 이어졌지. 그러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한 거야. 분노한 주민들, 그런데 이래도 되나 싶게 순순히 멈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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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요새 세상처럼 관공서에서 하는 일을 우리가 대들지 못했어요. 대들다니 어디 감히 말할 수가 없죠."

-정재택,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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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뭐 총이 있어 뭐가 있어요. 들은 건 작대기 하나씩밖에 없고. 최루탄 맞고 코 막고 막 눈물 나고. 그러니까 그냥 다들 자진해산을 했어요."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사실 광주대단지 주민들 대부분은 나라에서 하는 일에 감히 반발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어. 철거를 한다니까 서울에서 밀려나고, 광주대단지에서 살라니까 그냥 거기서 산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그저 먹고 살게 해달라는 이 궐기대회도 허무하리만큼 빨리 끝났어. 그럼 이날 주민들의 궐기대회 실패로 끝난 걸까? 성과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을 곳곳에 웬 안내문이 걸려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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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에서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어떻게 된 걸까? 다음 날인 1971년 8월 11일, 정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사태수습책을 내놔. 땅값을 내려 5년간 분할 납부하고 취득세도 면제해주는 한편, 하루 3천명 규모로 취업인원도 늘리겠다는 거야. 게다가 1시간 30분 걸리던 서울과의 거리를 40분대로 줄일 도로개통까지 추진하겠대. 일사천리지? 그런데 말이야. 양시장 왜 약속 장소에 안 나타난 걸까? 사실 양시장은 광주대단지에 오긴 왔었어. 다만 약속시간보다 늦은 오전 11시 10분에 도착했지. 길이 막혔다는데, 어쨌든 부랴부랴 현장에 도착해서 수많은 인파를 보고 나니까 겁이 나서 협상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꿨던 거야. 그리고는 주민 대표들과 극적 타결을 했던 거지.

▲ 극적 타결 뒤 숨겨진 진실

그런데 이상한 거 없어? 단 한 번의 궐기대회로 이렇게 빨리 해결될 수 있었던 광주대단지의 문제, 그동안 왜 진척이 안 됐을까? 이건 궐기대회가 있기 1년 3개월 전인 1970년 5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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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 및 필요 조치사항>

#지선하수로 문제

현황: 홍수 나면 철거민의 피해가 예상됨.

필요 조치: 홍수기 전에 지선 하수로 공사 필요.

#이주민 자활 대책

현황: 철거 시 소맥분 반 포 지급 이외에는 별다른 구호가 없음

#전기 가설 문제

현황: 300만 단지 외곽 지역까지만 전기 가설이 되었음.

필요 조치: 철거민 수요자 부담을 경감하는 방안 연구.

서울시는 물론 청와대에서도 상황은 알고 있었어. 그럼 왜 실행을 안 했을까? 문제는 돈이었어. 김현옥 시장의 각종 개발들로 60년대 후반 서울시에 재정난은 심각한 수준이었거든. 부채만 85억 원, 지금으로 치면 3천억 정도야. 그럼 서울시는 어떻게 했을까? 서울시는 철거민들의 주거시설에 써야 할 돈을 줄였어. 그 결과 날림으로 지어진 와우 아파트는 무너져 내렸고, 광주대단지엔 기반시설이 제때 놓이지 않았던 거야. 무리하게 계획을 한 것이 화근이고, 결국 시민들이 희생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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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시기, 광주대단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던 곳이 있었어. 강남이야. 그 얘기 들어봤지? 강남도 개발하기 전에는 허허벌판이었다는 얘기. 하지만 도시를 만드는 과정은 완전히 달랐어. 강남, 그러니까 당시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68년. 강북과 강남을 잇는 제3 한강교가 개통된 건, 다음 해였어. 그리고 첫 이주민이 들어온 건, 1971년 영동 공무원 아파트가 세워진 뒤였어. 각자 도생하라며 사람부터 옮겨놨던 광주대단지와는 너무 다르지. 그럼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강남과 광주대단지, 이 차이는 왜 생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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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서울시의 발전을 위해서 희생이 된 곳이 여기(광주대단지)라고 봤죠.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여기 와서 판자촌에 사나 거기서 사나 다 똑같으니까. 그냥 내보낸 거예요. 그러고서 판자촌을 고급 땅으로 만들어서 서울시 이익을 본 거고. 그냥 보내준다고 하고 광주대나지에 만 원짜리 땅을 만들어 줬지만, 자기네들은 거기서 수억짜리 땅을 만드는 거 아니에요?"

-유협종, 당시 광주대단지 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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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유를 그렇게 들어요. 앞마당 개발은 강남 개발이고, 뒷마당 개발은 광주대단지라고. 그래서 앞마당은 보이는 마당이잖아요. 보이는 마당은 우리가 꾸민다고, 나무도 심고. 뒷마당은 어느 집에 가도 대개 여러가지 구질구질한 시설들을 갖다 놔요. 그야말로 약자들이 가니까,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 가니까, 정부가 그런 것을 신경 안 쓰고 그냥 사람들을 쏟아 부은 거예요."

-조명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명예교수

사실 강남과 광주대단지는 이렇게 불리기도 해. 대한민국 도시 개발의 빛과 그림자. 강남은 미래를 준비하는 개발이었고, 광주대단지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이었거든. 그때 서울이 밀어냈던 건, 사실 사람이 아니라 가난이었던 거야.

▲ 색출과 낙인

그렇다면 1971년 8월 10일 이후, 주민들의 삶은 어땠을까?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지금부터는 색출의 시간이야.

궐기대회 다음 날인 8월 11일, 상복이는 집 앞 골목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남자 두 명이 찾아와선 말을 걸어. "야, 너 송상복이지?"라고 물어 그렇다고 하니, 갑자기 사람들이 팔을 뒤로 꺾고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상복이를 끌고 갔어. 형사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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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가 시켜서 한 거다, 뭐 그런 소리가 있어서 '같이 있던 친구 이름을 대라', '집을 알려달라' 그래서 '나는 모른다 무조건 모른다' '남한테 불고 그러는 건 싫다, 난 무조건 모른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랬는데 여기 뒤를 이렇게 대고 곤봉을 여기다 끼워서 비비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걸음을 못 걸어요. 다리가 팅팅 부어서 걸음을 못 걸었어요. 그래도 나는 누구 하나 이름 하나 안 불었어요."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없는 죄를 또 만든 거야. 배후가 있다는 거야. 이건 사건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된 문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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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동자에 대한 조치>

"주동급 난동자를 구속 엄벌하도록 하고 불순분자의 개재 가능성을 배제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대책: 민심 수습, 주동자의 엄벌과 대민 경고.

"주동자는 엄단에 처하라"

결국 집시법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된 주민은 21명. 그 중 미성년자가 12명이었어. 그리고 1972년 1월, 1심 선고 공판이 열렸지. 차량과 건물을 불태운 2명은 징역 2년 실형을, 그리고 18명은 집행유예, 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어. 돌을 던진 혐의로 구속됐던 상복이도 집행유예로 풀려났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뒤로도 구속됐던 주민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게 아니었대. 형사들의 감시가 계속됐거든.

"정보과 형사 한 명당 우리 (시위 가담자) 2명씩 담당이에요. 그 뒤로도 계속 우릴 감시하는 거예요. 그때는 뭐 휴대전화도 없고 전화도 없으니까 '너희 어디 가면 신고하고 가라' 그렇게 한 1년 동안 감시받았던 것 같아요."
-송상복,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감시의 이유는 뭐였을까? 박정희 대통령은 수만 명의 주민들이 또 결집하거나 정치적 문제로 커질 것을 두려워했어. 그래서 아예 싹을 자른 거지. 때문에 1973년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이 된 이후에도, 이곳 주민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 얘기를 쉽게 못 꺼냈대. 어느새 광주대단지엔 '가난한 불순분자들의 땅'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었거든.

▲ 8.10 성남항쟁

자 그럼 이날의 궐기대회, 정말 폭도들이 벌인 난동이었을까? 사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생존 문제 때문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도시 빈민 투쟁으로 평가돼. 이날은 가진 것 없었던 이들의 마지막 결사항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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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우리도 이걸 폭동이라고 생각을 했으면 그걸 했겠어요. 당연히 해야 될 일, 정부에 대한 우리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일, 그렇게 생각을 했지."

-유협종, 당시 광주대단지 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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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특별히 주동자가 된 것이 아니고, 다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죠."

-정재택,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

"도구는 무슨 뭐 막대기 뭐 괭이도 들고 호미도 들고. 그냥 오합지졸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서로 '하자!' 그러니까 그냥 나오면서 뭐 있는 거 들고 나온 거예요."
-이보택, 당시 광주대단지 취재 기자

만약 정부가 약속을 애초에 지켰다면, 아니 사람들이 굶고 병들어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도 아니면 이들의 절박함을 단 한 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이날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광주대단지에서 벌어진 궐기대회가 다시 조명된 건, 반세기가 흐른 뒤였어. 2024년 12월, 이 궐기대회를 부르는 공식 명칭도 정해져. 바로 '8.10 성남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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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10일 그날이 비로소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국가에 저항한 날로 역사에 남게 된 거야.

그런데 말이야, 성남항쟁에서 반백 년이 흐른 지금, 그 도시 빈민을 둘러싼 괴담은 사라진 걸까?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비닐하우스만 모인 밭 한 가운데에서, 밤마다 불이 켜진다'는 얘기. 사실 거긴, 정말 사람이 살고 있었거든.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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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빈곤 상태에 있는 주거 약자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상대 빈곤층에 있는 주거 약자들은 많습니다. 지하 셋방이라든가 월세, 옥탑방이라든가 예컨대 비닐하우스라든가 아주 저렴한 농가주택으로 들어간다든가. 이런 식으로 해서 주거약자들이 현재는 다 흩어져 있어요. 서울의 집값이 조금 오르면 다시 쫓겨납니다. 그 사람들은. 정부가 안 쫓아내도 자본 시장이 쫓아내죠. 여전히 그런 계층들이 있는 거예요."

-조명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명예교수

사실 1970년대 초반 광주대단지 안에서도 섬처럼 여겨지는 동네가 또 있었어. 일명 '달나라 별나라'.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 이른바 '달동네'를 뜻하는 거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분양권을 팔고도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 철거 이주민이거나, '저길 가면 잘 살 수 있다더라' 라는 말만 믿고 광주대단지를 찾아온 도시 빈민들이었어. 가난한 곳에서도 더 가난했던 이들은, '삿갓집'이라 불리는 움막에서 산나물로 연명하며 근근이 살았다고 해.

하지만 이들 곁엔 그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은 이웃도 있었어. 광주대단지 사건이 벌어졌을 그 당시에 대학생이었던 최규성 씨는 달나라 별나라의 야학 교사였어.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천막 학교다 보니까 어려움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고 해. 또 태풍이라도 오면 교사들은 밤낮없이 학교에 왔대. 천막을 붙잡아야 했거든. 또 불법 건물이다 보니 철거를 당하거나 신고를 당하는 일도 많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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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늘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어.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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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또 건축법 위반으로 벌금 30만 원 떨어졌어요. 벌금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40만 원이 왔어요. 저기 수원 우체국에서. 그래서 이 40만 원을 보낸 게 누군지 모르잖아요. 무명으로 왔기 때문에. 내가 우체국까지 찾아 가서 '40만 원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겠다' 그랬더니 보내준 분이, 수원지방법원에 가면 이문성 씨라고 있다고. 그래서 이문성 씨가 누군가 하고 찾아가 봤는데, (건축법 위반 사건) 재판을 맡았던 세 판사 중에 가운데는 주임 판사가 이문성이라고. 그분이 나한테 좋은 일 하려면 어려운 일도 많다고, 참고 끝까지 잘 하시라고..."

-최규성, 당시 광주대단지 야학 교사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어.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곳엔 또 누군가의 가난을 혼자만의 몫으로 두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지.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또 밤마다 불을 밝혀서 누군가 글자를 가르치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구했던 사람들. 이들에게 국가는 어떤 존재였을까. 또 국가에게 이들은 어떤 국민이었을까.

오늘 이야기는 한 도시정책 전문가의 글로 마무리하려고 해.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가난이 머무는 집은 더 다독이며 챙겨야 한다."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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