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세련되고 젠틀한 '실장님' 캐릭터는 오랫동안 배우 주상욱을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깔끔하고 정돈된 이미지는 배우 주상욱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자산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감싸는 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악의 결정체로 안방극장에 섬뜩한 충격을 안겼다. 지난 25일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김부장'(극본 남대중, 연출 이승영 이소은)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주강찬'으로 분해 극의 긴장감을 책임졌고, 이에 힘입어 드라마는 마의 '시청률 20%' 벽을 넘으며 시청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 종영 후 언론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주상욱은 '김부장' 흥행의 전율을 온전히 만끽하는 듯 밝은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을 못 했을 거다. (방영되는 동안) 매일이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첫 악역 도전…이미지 변신 의도 없었지만, 연기 인생 터닝포인트"
배우로서 악역에 대한 목마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열망이다. '실장님' 이미지가 강한 주상욱에게도 악역 도전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주강찬'이라는 인물이 의도적인 이미지 변신을 위한 타협점은 아니었다. 캐릭터의 매력에 이끌려 뛰어든 선택이었다.
"어느 배우나 악역에 대한 로망은 갖고 있을 겁니다. 예전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강렬한 악역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품고 있었지만, 제게 악역 제안이 쉽게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악역 전문 배우들이 많으니 굳이 저한테까지 역할이 오진 않았던 거 같아요. 이번 주강찬을 통해 연기 변신을 시도하려던 건 아니에요. 대본을 봤을 때 주강찬 캐릭터가 평범하지 않고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실장님 이미지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임팩트 있는 악역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에게 '주강찬'을 건넨 이는 다름 아닌 OCN '특수사건 전담반 TEN' 시리즈를 함께했던 이승영 감독이었다. 수년 전 괴물을 잡는 형사 여지훈(주상욱 분) 캐릭터를 같이 만들었던 감독은, 본격적으로 악역을 해본 적 없는 주상욱에게서 '괴물 주강찬'의 가능성을 간파해 냈다.
"감독님과 '특수사건 전담반 TEN' 시즌 두 개를 같이 하며 오랜 시간 호흡을 맞췄는데, 늘 '주상욱이란 배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제 캐릭터가 괴물들을 잡는 형사 여지훈이었는데, 이번에 '김부장'을 촬영하며 감독님이 '그때 우리가 잡으려고 했던 괴물이, 지금의 주강찬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나이 또래의 많은 배우들이 이 역할을 원했던 걸로 아는데, 감독님이 주강찬을 보고 절 떠올리셨다는 게 감사하죠."
이 감독은 '김부장'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주상욱의 연기 인생은 '김부장'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다. 그리고 그 예견은 현실이 됐다. 주상욱은 다정한 아빠, 신사적인 경영인의 탈을 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의 주강찬을 섬뜩하게 그려내며 또 하나의 매력적인 악인을 탄생시켰다. 주상욱은 제작발표회 당시 이 감독이 했던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당시엔 마케팅용 멘트인가 싶어 '왜 저러시지?' 했죠. 지금은 감독님이 보는 눈이 있으시구나 싶어요.(웃음) 감독님이 편집을 하시면서, 주강찬이란 캐릭터는 확실히 남을 거라 확신이 드셨던 거 같아요. 다 감독님이 잘 만들어주셨기 때문이죠. 저한테 '김부장' 속 주강찬은 특별해요. 단순히 해보지 않은 악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연기를 함에 있어서 그동안과는 달랐어요. 대본을 해석하고 캐릭터에 접근하는 저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자이언트' 이후 제 연기 인생에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된 거 같아요."
▲ 소시오패스 주강찬 어떻게 만들었나
주상욱이 해석한 주강찬은 단순한 분노 표출형 악당이 아니었다. 회가 거듭되고 인물의 서사가 쌓여 나가면, 나중에는 주강찬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악인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강찬의 대사와 표정에 집중하며 세밀하게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다.
"한수(최대훈 분)나 진철(윤경호 분)이 상황에 맞는 유쾌한 애드리브를 고민할 때, 저는 대사에 집중했습니다. 악행은 당연하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대사나 표정이야말로 주강찬이라는 소시오패스를 완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 게 더 소시오패스로 보일지, 그런 걸 감독님과 고민을 많이 했어요. 딸의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건 확인했니?'라고 묻거나,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고맙다고 해야지' 같은 대사 몇 마디가, 주강찬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기에 적절했다고 생각돼요."
시청자들에게 가장 큰 쾌감을 안긴 장면은 단연 7회에 펼쳐진 주강찬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신이었다. 김부장(소지섭 분)에게 무자비하게 맞고 무너지는 주강찬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시청률 폭등의 기폭제가 됐다.
"주강찬이 김부장에게 맞는 걸, 다들 정말 통쾌해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좋아해 주실 줄이야. 그래서 제 빌런 연기에 점수를 준다면 8점 이상을 주고 싶어요. 맞는 표정 연기는 처음 해봤는데, 멋있어 보이려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맞으려 했어요. 제가 심하게 맞아야만 보시는 시청자들이 더 통쾌하게 느낄 테니까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부장한테 맞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민지(서수민 분) 앞에 무릎을 꿇는데, 그 장면을 맞는 신보다 먼저 찍었어요. 그래서 연결이 좀 자연스럽지 못해요. 나중에 모니터 하면서 그 점이 좀 아쉽더라고요."
주강찬은 '김부장' 1부 사우나 신에서 문신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로 지져, 화상 자국이 가득한 몸으로 강렬하게 등장한다. 그 첫 등장을 위해 주상욱은 3개월간 혹독한 식단과 운동을 병행하며 탄탄한 몸을 만들어냈다. 주상욱은 "그런 첫 등장에서 시청자들이 주강찬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나"라며 배우로서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보였다.
▲ "딸 향한 부성애는 똑같지만, 주강찬에 공감은 안 돼"
극 중 주강찬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김부장 역 배우 소지섭에게는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이번 작품으로 처음 같이 연기를 해봤는데, 정말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선하지?' 싶었어요. 하루 종일 때리고 맞는 격렬한 액션을 찍으면서도, 컷 소리만 나면 달려와 '괜찮냐'고 저를 먼저 챙겨줬어요. 그게 진심이 느껴졌죠. 그리고 액션을 워낙 잘하는 배우라, 저도 많이 배웠어요. 맞으면서도 정말 즐겁게 연기했습니다."
김부장은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며 위험에 맞선다. 반면 주강찬은 딸이 저지른 잘못을 덮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잘못된 부성애를 지닌 아빠다. 실제로 9살 딸을 둔 아빠 주상욱으로서 캐릭터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는 부성애는 김부장이나 주강찬이나 저나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주강찬처럼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는 방식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죠. 연기할 때는 오롯이 주강찬의 입장만 생각하며 연기했지, 아빠로서 공감하려 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실제 '아빠 주상욱'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드라마 속 윤경호의 캐릭터 박진철과 자신의 현실 모습이 쏙 빼닮았다고 고백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실제 저는 진철이 같아요. 밖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집에 돌아갔는데, 딸이 '아빠 나갔었어?' 하고 무심하게 반응하고, 진철이는 '내가 우리딸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며 혼자 상처받잖아요. 그게 딱 딸 가진 현실 아빠들의 모습이자 제 미래의 모습 같아요.(웃음)"
▲ "주강찬은 연기 인생 새로운 막의 시작점"
악역으로 한층 단단해진 기량을 증명해 냈음에도, 주상욱은 다가올 연말 연기대상에 대한 욕심을 경쾌하게 내려놓았다. 지난 2022년 KBS에서 '태종 이방원'으로 대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전 상 욕심이 없어요. 제작진과 배우들이 고생한 만큼 연말에 다 같이 모여 축제를 즐기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번 작품은 대상부터 신인상, 커플상, 조연상까지 상을 받을 분들이 너무 명확해서 제 자리까지는 안 올 것 같아요.(웃음) 오히려 시청자분들이 인터넷 댓글로 주강찬을 향해 분노와 욕설을 쏟아내 주실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또 한 번의 확신을 보여준 그는, 이제 더 깊고 진한 영역을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 또 악역이 들어온다면, 서사가 깊고 매력적이라면 주저 없이 도전할 겁니다. 그리고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묵직하고 진한 '정통 느와르' 장르도 해보고 싶고요. 앞서 감독님께서 '김부장' 전과 후로 나뉠 거라 하셨던 것처럼, 연기적으로는 분명히 다를 거라 기대해요. 주강찬은 제게 평생 잊지 못할 캐릭터입니다. 저라는 배우에게 연기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준, 그 시작점이 주강찬이 아닐까 싶어요."
[사진=HB엔터테인먼트 제공, '김부장' 스틸컷]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