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쪽방촌의 진짜 이방인 정체가 드러났다.
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참혹한 죽음을 추적했다.
1992년, 경기도 동두천시의 쪽방촌에서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얼굴이 함몰되어 알몸 상태로 발견된 여성은 전두부 열창에 의한 실혈로 사망한 것.
피해자의 신체에 여러 개의 이물질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시신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간의 존엄이 무너진 처참한 모욕의 현장에서 사망한 여성의 이름은 윤금이. 그리고 수사를 통해 범인은 만 19세의 미 2사단 소속의 이병 케네스 마클.
그런데 경찰은 애써 잡은 마클을 조사하지도 구금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는 한미 SOFA 협정 조항들 때문이었다. 1950년 7월 12일 대전협정, 한국전쟁 발발로 나라의 안전이 흔들리던 때 만들어진 협정에서 공평성을 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20대 한국인이 잔혹한 죽음을 당했지만 한국 측에서 구금 조차 하지 못하는 미군 범죄자. 제한된 시간, 미국인 관계자 입회 하에만 조사가 진행되고 제한된 심문에 초동수사 주도권도 미국 측에 쥐어졌다.
이에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될 리 만무했다. 결국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동두천 시민들은 생계까지 포기하며 '미군 거부 운동'을 벌이며 마클의 처벌을 요구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미군들의 범죄, 특히 살인에도 미온적 대응을 보였다. 1967년에서 1987년까지 미군이 일으킨 범죄는 확인된 것만 무려 39,452건. 그리고 그중 한국에서 재판이 열린 건 234건에 불과했다.
1992년 10월 27일, 부대 앞 클럽을 찾은 마클은 만취 상태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윤금이와 마주쳤고 인사불성인 윤금이를 선의로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금이가 자신을 공격해 자신도 방어 차원에서 폭력을 저질렀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펼쳤다.
또한 자신은 죽음에 관여하지 않았고 평소 윤금이와 친분이 있던 미군 램버트가 자신과 윤금이를 보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살해한 것이라며 그가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램버트의 알리바이가 확인되었고, 마클은 후에도 거짓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윤금이에 대해 "그 여자는 죽을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 맞을 행동을 했다"라는 망언으로 분노를 자아냈다. 최후 변론에서까지 윤금이에 대한 사과는 없었던 마클. 이에 재판부는 마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판정에 불복한 마클은 항소했고 항소심에서는 마클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고 이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었다.
범행 당시 만 19살이었던 마클. 그의 범행에 대해 전문가는 "전위된 폭력성, 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목적보다 자기의 분노를 표현하는 게 우선시되고 있다. 램버트는 자기의 폭력을 투사하기에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모욕하고 도구화하고 있다. 자신의 분노, 전능감을 보여주기 위해 피해자가 살아있는 동안 신체 훼손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라고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마클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보인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윤금이는 대체 왜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비슷한 시기 동두천에서 또 하나의 살인 사건 벌어졌다. 윤금이와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일을 하던 여성의 죽음. 사실 이들은 "양공주, 양색시"라고 불리던 기지촌 여성이자 미군 위안부였던 것.
국가가 만든 기지촌은 국가가 성매매를 허가하고 장려하던 곳이었다. 기지촌을 장려하고 후원한 박정희 정권은 당시 미군 관련 업으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7000만 달러에 달하자 미군을 위한 기지촌 정화대책까지 펼치며 기지촌을 장악했다.
하지만 당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기지촌 여성들의 피살 사건에 나라는 침묵할 뿐이었다. 이에 나라에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느꼈던 기지촌 여성들. 이들은 쪽방촌의 진짜 이방인이었다.
수감 12년 3개월째 가석방되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 마클은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음주운전, 사기, 양육비 지급 문제, 가정 폭력, 가택 침입 등 무려 범죄를 10여 건 저질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고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건 발생 이틀 만에 급히 화장되어 상패동 공동묘지에 뿌려진 윤금이의 유해. 상패동 공동묘지는 기지촌 여성들이 비석하나 없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공원 공사가 진행되며 연고자가 있는 시신들은 유족들 수습 후 이전했고, 무연고자 유해는 한 장례업체가 이장을 담당해 이장이 된 것으로 발혀졌다. 특히 그곳에 있던 무연고 묘는 무려 780기, 대부분이 기지촌 여성들의 묘였다.
그리고 지난 2022년, 미군 위안부들이 8년간 이어온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대법원 판결이 공개됐다. 최후 진술에서 "우리가 잘못한 게 무엇이기에 내 나라에서 버림을 받아야 하나요? 안에서는 달러벌이의 애국자로 밖에서는 손가락질받는 그런 삶을 살아온 우리의 삶이 너무나 억울합니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기지촌 여성들.
이에 대법원은 "대한민국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며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폭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대법원의 판결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 같다고 느낀 피해자들.
미군 위안부 122명, 그 사이 27명의 여성들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남은 이들은 끝내 판결을 보지 못하고 떠난 고인들의 무덤에 판결문을 올렸다. 그리고 지난 3월 성평등가족부는 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전 미군 위안부 한 여성은 "그냥 평범하게 바라봐줬으면, 똑같은 존재로 봐줬으면 좋겠다"라며 유일한 소망을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