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이수근, 그는 간첩이 아니다
1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붉은 첩자 : Made in 1969'라는 부제로 이중간첩으로 사형을 당한 이수근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1967년 3월 22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정전위원회 회의가 막 끝난 때에 고급 세단이 북한국 초소의 차단기를 들이받았다.
세단을 탄 인물은 조선중앙통신사의 부사장 이수근. 북한의 고위급 언론인이 남한으로 귀순하기 위해 탈출극을 벌인 것이었다.
그는 서울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 속에 귀순에 성공했다. 시민들은 그를 '자유의 용사'라 칭송하며 환영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달라 눈물로 호소했다. 20년 넘게 김일성 찬양 기사를 작성하며 최고위급 언론인이 되었지만 충성심을 의심받고 숙청 위기에 탈출 결심한 이수근.
그의 탈북 사유를 알게 된 시민들은 이수근의 가족들 돌려보내 달려며 전국적인 서명 운동을 했고 두 달 만에 130만 명이 서명했다.
그런데 순탄할 줄만 알았던 그의 삶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수근의 탈북 1년 후, 그의 생사 확인에 대한 괴전화가 쏟아졌고 사람들 사이에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
그리고 얼마 후 이수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어 1969년, 이수근의 탈북 2년 뒤 그는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이라며 체포되었다.
판문점 탈출은 물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한 것 모두 거짓이라는 이야기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1968년 북한의 분노가 극에 달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며 북에 대한 분노가 가시기도 전에 이수근이 이중간첩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시민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자유의 용사? 아니면 붉은 첩자?
이수근은 수염과 안경으로 위장하고 위조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도운 아내의 조카인 배경옥. 베트남에 근무하다가 한국에 들어온 배 씨는 이 씨의 요청으로 이 씨의 위조 여권을 만들었고 함께 출국했다.
이수근의 정체를 의심하며 감시 중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이수근이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에 비상이 걸렸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전 요원들을 동원해 이수근을 추적했다.
홍콩에서 베트남으로 이동하려던 이수근과 배경옥. 김형욱 중정부장은 베트남에 근무하고 있던 이대용 공사에게 연락을 했고 비행기의 이륙을 막아달라 부탁했다.
이에 이대용 공사는 당시 베트남 대통령에게 비행기 이륙 막아달라고 부탁했고 이륙하려던 순간 정지 명령이 떨어지며 이수근은 그대로 체포되었다.
탈북 2년 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수근. 그는 첫 공판에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수근. 그리고 그는 선고 54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했다. 또한 배경옥은 최종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여기까지가 당시 알려진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사형 집행 후 17년이 지난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조갑제 기자는 취재를 위해 이대용 공사를 만났다. 그리고 얼마 후 조갑제 기자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라는 내용의 최초 보도를 했다.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라는 이대용 공사. 그리고 그 후 김형욱 밑에서 중정 국장을 했던 인물에게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증언을 듣게 되었던 것.
그렇다면 이수근이 목숨을 걸고 남한에서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67년 3월, 반공 강연 1타 강사가 된 이수근은 고민에 빠졌다. 북에 남겨진 가족의 안위 때문에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그의 의도는 의심을 받았다. 도청과 미행 등으로 그에 대한 감시가 시작되었고, 중정은 수시로 그를 불러 북측과 내통 여부를 조사하며 구타를 넘어 총을 쏘며 의심했다.
이에 결국 제3 국으로 탈출을 결심한 이수근. 그의 최종 목적지는 중립국으로 북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그는 체포 후 이 공사에게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도 자유가 없더라"라는 말을 남겨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자유를 찾아온 그, 하지만 그가 염원한 자유는 남북 어디에도 없었던 것.
정신과 전문의는 "평생을 충성해 온 체제를 버리고 온 것은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다. 그런데 두 번째 세상인 남한에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황은 트라우마의 재경험이다. 진짜 자유를 찾고 싶다, 중립 국가로 떠나는 것은 이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심리"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조갑제 기자는 "그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게 중요하다. 지식인은 권력에 무조건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지식인의 운명이라고 보인다"라고 덧붙였다.
1심 사형 선고 직후 항소 의사를 밝혔지만 만료 기일을 넘겨 항소하지 못했던 이수근.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항소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항소를 못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교도소까지 따라와서 그의 앞을 지키며 그를 압박했던 것. 당시 중정의 권력은 대통령 다음으로 중정이 이수근의 항소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는 왜 이수근이 간첩이어야 했을까? 조갑제 기자는 당시 김형욱과 중앙정보부가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이수근의 출국을 뒤늦게 알고 어디로 갔는지 아는데 이틀이 걸린 중앙정보부. 이는 정보기관으로서의 치명적 실수였던 것.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다는 것이 폭로될 위기에 처하며 김형욱도 완전한 위기에 몰렸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이수근을 귀순한 간첩으로 만드는 일에 이른 것이다.
감찰실은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을 감추기 위해, 김형욱은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수근을 간첩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 이수근이 죽어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었다.
사형 집행 후 37년이 지난날 이수근은 간첩 조작 의혹 사건 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처조카인 배경욱이 신청을 했던 것.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배 씨는 1989년, 51살의 나이로 출소했다. 억울하게 20년간 수감한 배경옥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진술서를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거 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체포 직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두 사람. 중정은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온갖 고문을 하며 그들을 압박했다. 결국 모든 진술이 조작임이 드러났다.
재심 재판장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것에 해당하므로 배경옥에 대한 무죄를 선고한다. 이제 피고인은 법정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가도 좋습니다"라며 그가 법의 사슬에서 풀려나 밝은 태양 아래 당당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길 빌었다.
2008년 12월, 무죄를 선고받은 배경옥. 하지만 당시 이수근은 여전히 간첩이었다. 이에 배 씨는 "이모부의 명예를 회복하고 이모부의 이름을 영원히 남겨주고 싶었다"라며 그의 재심을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2018년, 이수근 간첩 조작 재판 재심은 이수근의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낙인찍힌 채 사형 집행에 의하여 생명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는바 이에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피고인과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라며 49년 만에 진실을 밝혔다.
이수근의 무죄 소식에 배경옥은 서울 구치소 무연고자 무덤을 찾았다. 무연고자 276인의 시신이 함께 합장된 이곳에서 이수근의 유해를 찾을 수도 없고 비석에 이름을 새길 수도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방송 말미 배경옥을 수소문한 제작진. 그러나 그는 이수근의 간첩 조작 사건의 재심 결과가 나온 지 1년 후인 2019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제작진은 취재 과정에서 여전히 이수근이 위장 간첩이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묘비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수근. 이제라도 이수근이라는 인물이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인간이라 기억하는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것이 아닐까.
남과 북 어디에서도 믿음을 얻지 못한 채 이중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사망한 이수근. 그를 지켜줄 국가 시스템의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곁에는 배경옥 씨를 비롯해 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힘쓴 이들이 여럿 있었다.
이에 방송은 이수근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 이들처럼 우리도 누군가가 의심받고 오해받을 때 안전 깃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