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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전두환 3부작 마지막 이야기 '전두환 심판의 날'…사상 초유의 '전 대통령 체포 작전'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4.08.23 04:03 수정 2024.08.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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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그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전두환 심판의 날'이라는 부제로 전두환 트릴로지 그 마지막 이야기가 공개됐다.

1996년 3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을 맡은 판사들이 등장했고, 재판장은 막내 판사에게 법정 문을 잠그라는 당부를 했다.

보통 문을 잠그지 않는 법정임에도 재판장은 이날 재판 진행 도중 이상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법대로 올라와서 소란을 일으킬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당부를 했던 것.

그리고 곧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섰다. 총 16명의 피고인들 중 가장 먼저 들어온 이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그를 향해 누군가는 응원의 박수를 보냈고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도 했다.

죄목이 무려 9개나 되는 피고인의 첫 번째 죄목은 반란수괴. 이는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집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피고인은 바로 꼬꼬무의 남주 전두환.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하고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인물이었다.

그는 체육관 투표로 대통령이 된 후 노동 종교 언론 등 사회 전 계층 탄압했고 불법 비자금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 이후 17년 만에 법정에 서게 된 것.

앞서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고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당시 정국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정국으로 노태우는 야당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야당은 전두환 정권의 비리와 5.18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고 이에 특별위원회가 설치되며 헌정 사상 최초의 국회 청문회인 제5공화국 청문회가 시작됐다.

TV 생중계까지 진행된 청문회는 시청률 81%를 넘기며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증인석에 오른 전두환은 사과는커녕 발포 명령은 정당한 자위권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청문회가 끝난 후 전두환의 일가와 친척들은 구속되었으나 전두환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후 대국민 사과를 통해 불법 비자금 사회환원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1993년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며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군부독재에 강하게 반발했던 김영삼은 정권을 잡자마자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던 세력인 하나회를 숙청했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그는 5.18 관련 담화문 발표를 통해 과거의 역사에 대한 평가는 훗날에 맡기자는 이야기를 해 국민들의 실망을 자아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당시 여당이었던 노태우의 민정당과 손을 잡은 그는 5공 군부에 대한 처벌 감형을 약속했고 이에 전두환과 군부 정권에 대한 칼을 빼들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과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이 반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전두환을 검찰에 직접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기소 유예 처분을 내리며 또다시 역사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영삼의 5.18 담화문과 같은 기조였던 것.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커지며 비판 여론이 들끓고 5.18 피해자와 유가족들도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공소권 없음 결론을 내려 충격을 안겼다.

이는 김영삼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바닥까지 내려간 민심을 되찾기 위해 역사바로 세우기 명분으로 과거사 청산을 단행했다. 5.18 특별법까지 만들어 검찰에 칼자루를 넘겼다.

과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담당했던 최환 검사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사건을 덮으라는 지시를 거부했고,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는 6월 항쟁을 촉발했고 그렇게 전두환 정권은 끝이 났다.

그렇게 전두환과 끈질긴 인연을 가진 최환 검사는 8년 뒤 서울중앙지검장이 되어 전두환 수사를 맡게 되었다.

곧바로 특수본을 꾸려 수사를 재개하겠다고 밝힌 최환 검사장. 그러나 전두환은 검찰의 출두 명령을 거부한 채 자신은 정치 보복에 대한 희생양이라며 출두 요구에 응할 수 없다며 고향인 합천으로 떠났다.

이를 도주라 여긴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긴급 체포를 결정했고 그렇게 사상 초유의 전 대통령 체포 작전이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자신을 막아서는 마을 청년들을 겨우 뚫고 전두환이 머물고 있는 5촌 조카의 집에 진입했다. 그리고 취침 중이던 전두환을 체포했다.

통곡하는 측근들과 친척들을 뒤로하고 전두환은 끝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안양교도소에 입소한 전두환.

그는 보름이 넘도록 단식 투쟁을 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체중이 10kg이나 빠진 그는 건강 악화로 실신 후 병원에 이송되었고 건강 회복 후 법정에 다시 서게 된 것.

그리고 그의 옆에는 절친 노태우도 함께 했다. 한 의원이 노태우가 무려 4천억 원의 비자금을 빼돌렸다고 폭로한 것. 노태우는 이에 대해 부인했으나 이후 김대중의 고백으로 결국 대국민 사과 발표 후 비자금 존재를 인정했다.

2,300억 원이 넘는 뇌물 수수 혐의가 밝혀지고 보름 먼저 수감된 노태우는 헌정사상 최초로 구치소에 들어간 전 대통령이 된 것.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 내내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전두환은 최후 진술에서도 자신은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12·12 군사반란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5·18은 내란 목적 살해 행위가 아닌 시위 진압이 목적이었으며 자위권을 지시했을 뿐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1심 판결은 전두환에 대해서는 사형, 노태우에 대해서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이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이 확정됐다.

다른 수용자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수감 생활을 한 두 전 대통령. 하지만 이들은 불과 2년 만에 출소한다.

15대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은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 이에 두 사람은 국민 대화합이라는 명분으로 각각 구속 750일, 767일 만에 출소했다.

이후 대통령 취임식, 전직 대통령 만찬에도 꼬박꼬박 참석한 전두환. 그는 이후 5·18은 폭동이라는 망언을 하고 추징금 미납 문제로 법원에 출석해서는 희대의 29만 1천 원 발언을 해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2017년에는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록 출간했는데 5·18 진상규명에 힘쓴 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가면 쓴 사탄이다.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비난해 유족들로부터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에 1심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결심 공판 6일 전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결국 사망했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 심판은 영원히 받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그런데 전두환이 사망한 날 전남 강진 저수지에서 또 다른 변사체 발견됐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피해자인 이광영 씨.

승려 생활 중 광주에 있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그는 적극적인 구호 활동에 참여하던 도중 계엄군의 흉탄이 척추에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후 그는 한평생 5·18 진상 규명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 살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생을 마감했다. 5·18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날 사망한 것이다.

죽기 전까지도 사과 한마디가 없던 전두환. 더 이상 그를 향한 심판은 할 수 없지만 가슴 한편에 그와 그가 벌인 일들을 무겁게 새기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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