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한국 축구의 아버지, '진짜 축버지' 김용식 선생.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경성축구단의 에이스'라는 부제로 한국 축구계의 역사 김용식 선생의 그날을 조명했다.
1929년, 경신학교와 숭실중학교의 축구 경기는 숭실중이 승리했다. 하지만 숭실중 선수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악에 받친 눈빛으로 까기의 명수 김용식 선수를 찾았다.
당시 매우 거칠던 축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 달랐다. 당시는 잘 까면 승리하는 것이었다는 축구계의 원로들의 이야기가 놀라움을 자아냈다.
경신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한 김용식 선수는 1934년 4월 중국 청진으로 해외 원정을 떠났다.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축구 관련 서적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향한 김용식. 그는 영국 교수가 쓴 현대 축구에 관한 글귀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가 본 책에는 축구는 신사적인 운동이며 진정한 스포츠맨십이 무엇인지 쓰여있던 것이다. 이를 본 김용식은 그전까지 거칠던 플레이를 그만두고 매너 그 자체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완전히 달라졌다.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깨닫게 해 준 글귀를 보고 변화한 그는 스포츠맨십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신념으로 새기며 훗날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가장 먼저 스포츠맨십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에도 활발했던 축구 경기. 당시 축구는 많은 이들이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울분에 찬 시기에 축구는 한국인의 기상, 조선인들의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스포츠였던 것.
특히 이런 시기 일본과의 대결은 더욱 열광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한일전은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당시 일본의 동포들은 조선 축구팀에 "너희는 축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러 왔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축구는 저항의식을 상징하는 스포츠가 되었고,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처럼 체육인들은 체육 경기로 자신들만의 투쟁을 했던 것이다.
1935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 격인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김용식이 포함된 경성축구단은 조선 지역대표로 참가해 결승전까지 오르고 결승전에서는 6대 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어 진행된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서도 경성축구단은 전승 우승을 차지했고, 이에 경성축구단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 달리 25명의 1차 명단 중 조선인은 김용식과 김영근 단 두 명뿐이었다. 편파적인 선발과 차별에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조선인들. 이에 조선 축구협회는 보이콧을 하며 일본에 부당함을 어필했다. 그러나 일본은 묵살하며 자신들의 선택을 고수했다.
결국 차별을 참지 못한 김영근 선수는 대표팀을 사퇴했고 김용식 선수만이 유일한 조선인으로 남았다.
그는 "나는 여기 단 한 사람뿐인 조선인이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조선인의 명예를 위해 싸워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갔고, 일본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플레이로 그는 스웨덴과의 대결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었다.
당시 그와 함께 뛰었던 한 일본 선수는 그의 플레이에 대해 당시 일본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 평하며 그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 아래에는 조선이라는 조국에 대한 강한 마음이 있었고 일본의 공격이 성공한 것은 그의 힘이 컸다며 그의 존재감을 인정했다.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지만 세계의 벽을 실감한 김용식은 올림픽 후 1만 일 개인기 훈련이라는 믿기 어려운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만 일은 단순 계산으로도 무려 27년 하고도 145일의 기간인데 그는 올림픽이 끝난 1936년 11월부터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베를린 올림픽 12년 후에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 런던 올림픽은 광복한 코리아를 전 세계에 알릴 기회였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태극전사들. 그리고 국가대표 축구팀 중에는 김용식 선수도 있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했던 그가 12년 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다시 출전한 것. 당시 만 38세였던 그는 첫 상대였던 멕시코와의 대결에서 5대 3으로 승리하는데 큰 힘을 보탰고, 온 세계는 코리아의 승리를 이변이라며 놀랐다.
1952년, 만 42세로 선수 은퇴를 선언한 김용식 선수. 그는 마흔까지 축구를 계속해야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지켜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출전이었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감독으로 참여했다. 그는 "다 져도 좋다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속이 좀 시원하지 않겠냐"라고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우리 대표팀은 참패하고 말았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었던 당시,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 지도서를 자비로 출판했다. 체계적인 훈련법과 전술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던 그는 선수들에게 셔틀런 훈련을 시키고 수십 가지의 작전을 만들어 이를 모두 문서로 남겼다.
이에 그의 제자들은 "우리 축구의 작전이나 축구의 흐름이 그분 덕에 많이 발전했다. 그것만큼은 사실이다"라며 스승의 위대한 업적을 언급했다.
우리나라 축구의 마지막 아시안컵 우승이었던 1960년 제2회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이끈 것도 김용식 감독이었다. 또한 그는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 한일전에서 승리했고 이후 한국 최초 프로 축구팀 할렐루야 축구단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우리나라 축구 역사 그 자체인 김용식 선생. 그는 일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 스스로 설정한 술 담배를 절대 하지 않고 체력을 단련해 마흔까지 축구를 하겠다는 다짐을 지켰고, 1979년 1월 15일 1만 일의 개인기 훈련이라는 엄청난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다. 무려 42년 2개월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방송에서는 백발이 되어서도 개인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의 훈련 영상이 공개됐다. 프리스타일 축구를 완벽하게 해내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감동하게 했다.
한국 축구의 역사 그 자체인 김용식 선생. 그러나 말년에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아파트 한 채뿐이었다. 이에 김용식 선생은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갈 길은 오직 축구이기 때문"이라며 오로지 한국 축구의 발전만 생각해 감탄을 자아냈다.
한국 축구의 대부, 한국 축구의 아버지 김용식 선생. 한국 축구의 영광의 나날들 그 한가운데에는 그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묘비 비문에는 "한 사람이 한평생 외골수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 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이라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김용식 선생의 제자들은 "축구계가 많이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많이 발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 축구로서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고 앞으로 더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선수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라며 한국 축구의 발전을 응원했다.
또한 "공부하는 선수가 되어달라. 절름발이 선수가 되지 말라. 참다운 스포츠맨십을 갖춘 선수가 돼라. 어떤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고 노력하는 선수가 돼라"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