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범인의 정체는?
1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옆 방 살인마'라는 부제로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을 조명했다.
2008년 10월, 서울 마포구에서 횟집을 운영 중이던 병호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받고 그가 도착한 곳은 한 대학병원의 영안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존재와 마주했다. 중국 유학 중 잠깐 한국에 돌아온 딸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던 것.
경찰은 그에게 딸이 살해를 당했으며, 잔혹하게 살해당한 장소는 바로 강남의 한 고시원이라고 했다.
사실 병호 씨의 딸 진이는 아버지와 오빠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가계 사정이 나빠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로 축구 선수로 뛰던 오빠가 부상으로 재계약에 실패했던 것.
이에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진이는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계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흥의 고모집에서 강남의 한 음식점으로 출퇴근을 하며 하루에 13시간씩 알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출퇴근이 반복될수록 어려움을 느꼈고, 이에 진이는 근무처와 가까운 강남의 논현동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진이는 왜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일까.
입주민 대부분이 근처 시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취업 준비생이었던 논현동의 D고시원. 그런데 그중에는 최악의 살인마도 있었던 것이다.
2008년 10월 20일 오전 8시, 고시원에 화재가 발생했고 뿌연 연기가 금세 고시원을 덮쳤다. 이에 탈출을 위해 방을 뛰쳐나온 사람들. 그런데 길목 앞에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정 옷으로 무장을 하고 머리에는 랜턴, 그리고 마스크와 물안경까지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또한 그의 손에는 50센티미터의 회칼과 허리에는 가스총까지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발목에도 두 개의 과도가 숨겨져 있어 보는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범인은 복도로 나온 중국 동포 선자 씨를 향해 무자비한 칼부림을 했다.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한국으로 와서 일을 했던 선자 씨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이후 그는 소화기로 불을 끄려던 취업 준비생 마준기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복부만 3차례 공격을 당한 마준기는 다른 이를 공격하려는 범인을 피해 간신히 총무실에 몸을 숨겼다.
4층으로 이동한 범인은 건강에 이상이 생겨 가족에게 짐이 될까 봐 고시원에서 생활 중이던 40대 정임 씨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병호 씨의 딸 진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에 범인은 진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정임 씨가 범인을 가로막았다. 진이 또래의 아들이 있던 정임 씨는 엄마의 마음으로 진이를 구하려고 범인의 두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잔혹한 범인은 정임 씨뿐만 아니라 진이까지 무차별하게 살해했다.
이때 총무실로 몸을 숨긴 준기 씨는 119에 전화를 걸어 있는 힘을 다 해 구조 요청을 했다.
그리고 4층에 살던 고시생 지섭 씨도 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왔고,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범인의 칼에 팔과 옆두리가 관통되었다. 이에 지섭 씨는 자상을 입은 부분을 부여잡고 계단을 뒹굴었고, 그렇게 고시원을 가장 처음 탈출했다.
다시 3층으로 돌아간 범인, 그리고 총무실에 있던 준기 씨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범인은 바로 해당 고시원에 5년째 살고 있던 정상진. 고깃집에서 일을 하던 그는 한순간 살인범이 된 것이었다.
오전 9시에 되어서야 현장에 도착한 경찰과 소방관들. 끔찍한 방화 살인 사건은 무려 40분간 이어졌다.
소방관들은 화재 진압과 함께 인명 구조를 진행했다. 그리고 한 경찰은 구조되는 사람들 속에서 화상을 입은 한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온몸을 뒤덮은 핏자국에도 몸 어디에도 칼에 찔린 상처는 없던 그 남자는 바로 살인범 정상진이었다.
정상진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해한 후 무기와 범행 도구를 모두 버리고 피해자인 척 방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상진은 구조 직전 현장에서 극적으로 검거됐다.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총 6명. 5명은 정상진의 칼에 찔려 죽고, 1명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추락사당했다. 중상자도 7명이나 됐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진 유족들과 달리 정상진은 세상을 탓하며 자신의 범행에 대해 변명만 했다.
큰 좌절감과 피해망상에 빠진 정상진은 과거 수차례 자살 시도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전문가는 "수차례 자살 시도한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살과 타살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라며 자살과 타살은 공격성의 대상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어 전문가는 "소극적인 상황에서 누적된 스트레스가 단 한 번의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는데 그게 엄청난 사고를 일으켰다고 생각한다"라고 분석했다.
평소 위험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던 정상진. 하지만 그에 대해 이상을 감지했던 인물이 있었다. 해당 고시원의 총무.
그는 사건 발생 한 달 전 소방 점검을 위해 그의 방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고, 그의 방 광경을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정상진의 방에는 장난감 총, 터보 라이터를 비롯해 크고 작은 인형 수십 개가 오와 열을 지켜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정상진은 하루에 60만 원 이상을 투자하고, 비가 오는 상황에서도 3시간 이상 몰입할 정도로 인형 뽑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는 월급 대부분을 인형 뽑기로 탕진했고, 그렇게 탕진한 금액이 최소 천만 원 이상이었다.
전문가는 인형 뽑기에 집착한 것에 대해 "탈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범인에게 그것만이 유일하게 도파민을 상승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목숨 걸고 거기 빠져 있었던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범행에 사용한 범행 도구도 모두 인형 뽑기를 이용해 뽑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했다.
대량 학살범들의 허세 가득한 글과 닮은 글을 무려 4년 전에 썼던 정상진. 그에게 대체 무엇이 트리거가 되었던 것일까?
정상진은 예비군 훈련을 계속 미루었고, 이에 벌금은 어느 순간 150만 원까지 쌓였다. 봄부터 무직 상태였던 그는 벌금을 비롯해 월세, 휴대폰 요금도 못 내고 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강남 경찰서에서는 정 씨에게 예비군 훈련 벌금 누적으로 인한 수배 사실을 알리며 경찰 출석을 요구했고, 그가 범행을 한 10월 20일은 바로 경찰이 요청한 출석일이었다.
또한 이날은 그가 미납된 고시원비를 주겠다고 주인에게 약속했던 날이기도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범행을 준비한 정상진. 그는 철저하게 범행을 준비해 가장 먼저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르고 복도에 서서 사람들이 나오길 기다렸던 것.
정상진은 정신 질환, 심신 미약 등을 주장했으나 정신 감정 결과 이상이 없음이 드러났고, 결국 법원은 그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이에 정상진은 항소하지 않았고, 사형은 최종 판결로 확정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 이에 정상진은 미집행 사형수로 15년째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자며 안전하게 살고 있어 이를 보는 이들을 분노케 했다.
무허가로 지어진 고시원. 이에 법원에서는 고시원 측에 이 사건에 대한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도 비상 대피로도 없어 범죄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사람들. 그럼에도 고시원 측에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법이 없었기에 이들을 처벌할 법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족들은 고시원 측과 서울시에 대해 고소를 진행했다.
소방법 및 공중위생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고시원 주인, 그는 대형 로펌 변호사 6명을 고용한 어마어마한 자산가였다. 그리고 법원은 예측 불가한 사건에 대해 고시원 추인과 서울시 모두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해당 사건 이후 관련법이 제정되며 현재는 일정 폭 이상의 복도가 만들어져야 하고 스프링클러가 필수로 설치되어야 하며, 안전 대피로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논현동 사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소연할 곳이 없는 유족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었다. 특히 병호 씨는 자신이 늘 잡고 일하던 칼을 쳐다볼 수도 없었고, 삶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런 그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돕겠다며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드라마 '모범택시' 속 범죄 피해자를 돕는 파랑새 재단의 대표의 모티브가 된 한국 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장 이용우 회장님.
그는 "범죄자 인권만 있고 피해자 인권은 없는 우리 사회"를 지적하며 "아무도 지원해주지 않던 시기에 피해자들을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센터가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사비를 털어 피해자와 유족들을 돕던 그는 이제 국가의 지원을 받아 도움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는 20년간의 노력의 결실이었고, 그의 노력 덕에 많은 것이 개선되어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