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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사진 한 장…김주열 열사와 4.19 혁명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2.01.28 02:38 수정 2022.01.2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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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세상을 바꾼 한 장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나를 찾아줘 - 1960 되살아온 아이'라는 부제로 3.15 마산 의거와 김주열 열사를 조명했다.

남원에 살고 있는 17세 김주열 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위해 두 살 위의 형과 함께 3월 10일 마산으로 향했다.

공부는 잘하지만 대학 갈 형편이 안 되는 친구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던 마산상고. 김주열 군 또한 마산상고 진학으로 집안을 일으킬 생각을 했다. 시험을 무사히 마친 김주열 군은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합격자 발표일인 3월 14일, 갑자기 합격자 발표는 미뤄졌다. 이에 주열 군은 남원으로 돌아가는 일정을 미루었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 예정일이었던 바로 다음 날인 3월 15일 주열 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열 군의 형은 주열 군과 함께 마산 시내 구경에 나섰는데 갑자기 주열 군이 사라졌다는 것.

이 소식을 들은 주열 군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곧바로 마산으로 왔다. 마산에 도착해 경찰서부터 찾은 주열 군의 어머니. 그는 경찰을 붙들고 아들을 찾아 달라 사정했다. 그러나 경찰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채 만채 했고, 도리어 어머니를 쫓아냈다.

이에 혼자서 주열이를 찾기 시작한 어머니. 사진을 들고 마산 시내를 돌며 주열이를 못 봤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화장터까지도 다 뒤졌다. 주열이의 이야기는 마산에 다 퍼졌고 기자들도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당시 부산 일보의 마산 주재 허종 기자는 이 사건이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 확신하고 주열 군의 실종 기사를 보도하는 것부터 정보원을 풀어 주열 군의 소식을 추적했다. 또한 그는 항상 품에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주열 군의 실종 사건을 추적했다.

하지만 목격자도 없고 흔적도 없는 상황에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고, 주열 군의 어머니가 외치던 "우리 주열이 못 봤어요?"는 마산의 슬픈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주열 군의 실종은 마산의 미스터리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사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열 군의 시체를 시청 뒤 연못에 던졌다는 첩보. 이에 마산 시민 수천 명이 시청의 연못으로 몰려든 가운데 주열 군의 시체 수색이 시작됐다. 그러나 연못 물을 다 퍼내도 주열 군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주열 군의 어머니는 남편의 건강 악화에 남원으로 돌아갔다. 이에 어머니는 기자들에게 주열이를 끝까지 부탁하며 떠났다. 그런데 어머니가 떠나고 3시간 후 허종 기자의 정보원이 주열 군을 찾았다며 당장 중앙부두로 가보라고 했다.

허종 기자는 1KM의 거리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려 부두로 향했다. 그리고 바닷속의 소년을 본 그는 본 그 순간 그가 주열 군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어 그는 품의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그가 이날 찍은 사진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

보기만 해도 참혹한 주열 군의 사진. 주열 군은 물에 빠져있음에도 산 사람처럼 꼿꼿이 고개를 들고 주먹을 불끈 쥔 자세로 서있었다. 그리고 주열 군의 얼굴에 눈 부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쇳덩이가 박혀있었고, 이는 주열 군의 얼굴을 관통해 뒷목으로 나와있었다.

주열 군의 시신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소식을 들은 마산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어린 소년에게 누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주열 군의 눈에 박힌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프로펠러 부분이 눈 밖으로 나와있고 긴 쇳덩이가 머리를 관통해 뒷목을 뚫고 나와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 핀셋으로 그것을 두드리는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폭발한다는 이야기에 수술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쇳덩이의 정체를 아는 이는 이것이 불발탄인 것 같다고 했고, 이에 의료진은 군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육군에서 도착한 폭탄 전문가는 "어떤 포탄인지 뽑아봐야 알겠다"라며 불발탄의 어떤 종류인지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모르겠다고 했고, 그렇게 주열 군의 얼굴에서 불발탄의 제거 작전이 펼쳐졌다. 만약 이것이 터지면 많은 이들이 크게 다칠 수도 있을뿐더러 주열 군의 사인을 밝히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의료진들이 생각해낸 것이 무명실을 불발탄에 묶어 건물 밖에서 당기는 것이었다. 모두의 노력 덕에 무사히 뽑혀 나온 불발탄. 직경 3cm에 길이 20cm의 포탄은 미제 포탄이자 치명적인 효과를 내는 최루탄이었다.

군중을 향해 쏘지 말고 장벽 뒤의 사람에게만 사용하라는 경고문이 쓰여있을 정도의 강력한 무기인 이 것은 바리케이드나 벽 뒤에 숨은 테러리스트 진압 시에만 사용하는 최루탄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멀리 세게 날리기 위해 프로펠러가 달려있고, 손으로 던지는 것이 아닌 총으로 쏘는 최루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주열 군의 오른쪽 눈을 뚫고 왼쪽 목으로 나왔다는 것은 사람을 향해 대놓고 발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주열 군에 그런 최루탄을 쏜 것일까? 범인은 바로 마산 경찰서의 경비 주임 박종표 경위.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 현장을 통제하는 역을 하던 그는 왜 주열 군에게 최루탄을 쏜 것일까?

주열이가 사라진 것은 3월 15일. 그날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당시 2번의 개헌으로 12년째 장기집권 중이었던 이승만은 4선에 도전했다. 선거 한 달 전 야당의 후보가 사망하며 단독 출마가 되어 당선이 확정된 이승만. 그는 무능하고 인기도 없는 여당의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부통령에 올려야 했다.

이에 내무부 장관은 경찰 간부들을 불러 부정 선거를 주도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선거일이 다가오니 구체적인 비밀 지령이 내려왔다. 많은 지령 중에는 부득이할 경우 유혈극까지 실행할 것을 각오하라는 지령이 속해 있어 충격을 안겼다. 누군가가 항의를 하면 최루탄을 쏴서 진압을 하라는 것.

3.15 부정 선거 당일. 선거 초반 야당 측 참관인이 사전 투표를 눈치챘다. 그리고 이어 여기저기서 발각된 사전 투표. 이에 야당은 오전 10시 반 선거 중단을 선언하는 벽보를 붙였다.

이에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금세 3천 명이 넘었고, 주열 군의 형제도 시위대에 끼어서 함께 구호를 외쳤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던 시위대. 이들은 분위기기 휩쓸려 구호를 외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학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배웠는데 반대되는 행위를 하니까 막아야 한다는 마음이 자동적으로 샘솟았다"라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자는 생각뿐이었다"라고 시위에 함께 한 이유를 밝혔다.

시간이 갈수록 많아지는 시위대. 초조해진 경찰들은 이중 삼중으로 바 리케 아트를 치고 시위대와 대치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이성을 찾고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상사가 생긴다"라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전진하는 시민들. 이에 경찰들은 소방차로 전신주를 들이받아 도시 전체를 암흑 상태로 만들고, 경찰차의 헤드라이트를 시민들에게 향하게 하고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그 시위대들 가운데 주열 군 형제도 있었던 것. 그리고 어느 순간 형의 손을 놓친 주열 군. 그게 주열 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시위는 계속됐고, 이제 경찰은 최루탄이 아닌 실탄을 쏘기 시작했다. 경찰은 총상을 입은 학생의 등에 총을 겨누며 협박했고, 욕설과 구타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학생들을 모두 연행했다.

그날 밤 박 경위는 눈에 포탄이 박힌 시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부에 이를 보고했다. 그러자 상관은 박 경위에게 알아서 적당하게 처리하라 일렀고, 이에 박 경위는 주열 군의 몸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졌다. 주열 군의 시신이 영영 떠오르지 않기를 빌면서.

그러나 주열 군은 27일 만에 수면 위로 올라왔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거의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돌아왔다.

주열 군의 소식에 분노에 가득 찬 시민들은 병원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경찰도 막을 수 없었다. 선두에는 학생들,
그 뒤는 어머니들이 따랐는데 그날 총에 맞아 죽는 것은 주열 군만이 아니었다. 185명의 부상 9명의 사망 그중 10대가 6명이었다. 꿈을 꾸던 학생들이 국가의 손에 희생당한 것.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에 시위는 들불 번지듯 커져갔다. 그리고 어느새 시민들은 정권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마산 시위는 공산당이 배후 조종해서 일어난 폭동이다. 어린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 건 자식을 방임한 부모들의 책임이다"라는 망언을 내뱉었고, 이기붕 또한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경찰들 장난감으로 쓰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경찰들의 시민을 향한 실탄 사격이 다시 시작되고 10대 소년이 또다시 사망했다. 그러던 중 경찰은 주열 군의 어머니가 마산으로 향하지 않게 붙잡아두고 빨리 장례를 치르라 종용했다. 시신이 사라지면 세상은 조용해질 것이라 믿었던 것.

하지만 허종 기자의 사진이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졌고, 주열 군의 사진이 공개된 지 1주일 만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것.

이에 결국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지 딱 보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한 신문에 주열 군의 어머니 편지가 실렸다. 그는 "그들은 압제자의 불의, 권력의 횡포를 언제까지나 참아야 했던 너절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귀여운 자녀들을 잃은 어머니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눈물을 거둡시다.
자식들이 뿌린 따뜻한 선혈이 헛되지 않도록 이 나라의 어머니로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밉시다"라며 자신의 슬픔보다 희생된 아들과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

주열 군의 사망 후 주열 군 앞으로는 한 통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이는 바로 마산상고 합격증이었다. 특히 주열 군은 장학생으로 합격하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장학생으로 합격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우리가 편안히 누리는 일상의 기반이 된 그날, 허종 기자의 사진이 없었다면 주열 군의 죽음은 영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모든 변화들도 없었을 것.

주열 군,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자 길거리로 나선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시민들, 그리고 허종 기자. 그들이 흘린 피의 결실로 오늘의 우리가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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