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어느덧 26년차다. 1991년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배우 공형진은 쉼없이 달렸다. 영화, 드라마, 예능, 라디오 등 어떤 분야든 주어지는 것에 최선을 다했고, 그의 유쾌하고 인간적인 매력은 대중에게 '옆집 삼촌' 같은 편안함을 안겼다.
공형진이 악역을 연기한 적이 있던가. 오래된 연기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악인을 표현했던 순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뷰 자리에서 물었다. 공형진도 스스로 “악역을 잘 안 했었다”라고 회상했다.
악역과 거리가 멀었던 배우 공형진. 그가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애인있어요'(극본 배유미, 연출 최문석)에서 '민태석' 역을 맡아 완벽한 악인으로 거듭났다. 민태석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혹했고 이기적이었다. 공형진의 연기인생 중 '최고의 악역'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강한 악인 캐릭터였다.
민태석을 내려놓고 다시 인간미 폴폴 풍기는 모습으로 돌아온 공형진을 만났다.
# '애인있어요'가 50부작이었어요. 오래 한 만큼 끝낸 느낌이 남다를 거 같아요.
“방송은 6개월, 촬영기간은 8개월이었죠. 막판에 제가 3개월 더 하면 안 되냐고 했을 정도로, 드라마를 끝내는 게 섭섭했어요. 배우들과의 케미도 좋았고, 극중 제가 차지하고 있는 포지션이나 성격들도 그동안 안 해봤던 거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죠. 그러다 보니 끝난다는 게 굉장히 서운했어요.”
# 이토록 강렬한 악역을 맡았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민태석을 표현하고자 했나요?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즐겁고, 착하거나 인간미 있는 역할들을 많이 해왔어요. 그나마 악역은 영화 '가문' 시리즈에서 선보였던 검사 역할 정도였는데, 이번 민태석은 대놓고 악역이었죠. 전 민태석이 그냥 '나쁜 놈'이라 악행을 하는 게 아니라,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정당성을 찾고 싶었어요. 이 인물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작가님이 민태석의 성격을 구축할 수 있게끔 글을 잘 써주셨죠. 그 글을 토대로, 민태석이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보이게 하는 게 관건이라 생각했어요.”
# 민태석뿐만 아니라 최근 악역들이 많이 주목받고 있어요.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의 남규만처럼요. 이들과 민태석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조태오와 남규만은 민태석과 완전히 다른 인물이에요. 그 둘은 나쁜 놈인데 실세이고, 민태석은 그런 실세의 충직한 사냥개였어요.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신분상승에 대한 동경을 마음속 한(恨)처럼 품고 있었죠. 어떻게든 실력행사를 하려다 보니 악수를 두게 되고, 그게 장고가 되어 나중에 더 큰 악수를 두는 게 민태석이었어요. 영화 속 조태오는 결국 풀려나 반성 없이 잘 살았을 거예요. 실질적인 힘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민태석은 아무것도 없어요. '애인있어요' 결말에서 민태석은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데, 다 놓고 진심으로 속죄하죠. 다행이에요. 그런 계기가 마련되어서요. 그래서 나름 민태석에겐 연민도 생겨요.”
# '갓현주' 김현주 씨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주인공에 1인 2역을 넘어서는 연기로 큰 호평을 받았는데요, 곁에서 본 현주 씨는 어땠나요?
“오죽하면 '갓현주'라 하겠어요. 시청자가 그런 타이틀을 줬다는 것은, 그 어떤 평론가가 연기 잘한다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칭호예요. 김현주는 충분히 그런 말을 들을 만했어요. 후배이고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해요. 전 25년 연기했는데, 제가 알고 있던 여배우들 중에서 김현주가 제일 연기를 잘해요.”
# 아내 최진리 역의 백지원 씨는요? 최진리-민태석 부부는 코믹과 진지함을 동시에 그려내며 인상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 냈어요.
“백지원이란 배우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강호에 숨어 있는 고수였어요. 연극무대에서 갈고닦다가 충무로에 나온 여러 유수의 배우들과 궤를 같이 하는, 그야말로 낭중지추 같은 배우예요. 극중 진리와 태석의 신들은 쿠션처럼 완충 작용을 했어요.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계속 긴장감을 갖고 가는데, 태석과 진리가 나오면 실소가 터져나오죠. 그렇게 잠깐이라도,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완충작용을 한 게 태석과 진리의 장면이었던 거 같아요.”
# 최근 한 중견배우가 연기를 오래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예전만큼의 열정이 사라진 것 같다고 방송에서 고백해 화제를 모았어요. 공형진 씨도 연기경력 26년차로 만만치 않은 공력을 갖고 있는데요, 공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전 연기가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들어요. 지금은 잘한 것 같은데 3개월 뒤에 다시 제가 연기한 걸 보면 '저 때 왜 저랬을까' 하며 못 봐주겠어요. 경력이 길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에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제가 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진 않죠. 전 지금도 제게 어떤 역할이 올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늘 기대되고 설레요. 동시에 불안하고 위기감도 있어요. 작품이 끝날 때가 되면 다음 작품은 할 수 있을지, 언제 뭘 할지, 그런 걱정도 생기죠. 설렘과 위기감의 공존, 결국 절실한 마음이 계속 연기를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 그렇게 위기감이 느껴질 때, 스스로를 다잡는 글귀 같은 게 있나요?
“제가 대학생 때 동생이 4수를 했어요. 그 때 동생의 연습장을 우연히 봤는데 '자, 이제 마지막이다. 그렇군, 마지막이군'이라고 써놓은 걸 봤어요. 그 이후, 그 글귀를 되뇌요. 매번 제가 하는 작품, 그걸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연기하려 해요. 그럼 훨씬 더 절실해질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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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