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허 일병은 어떻게 사망했나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두 발의 총성, 그리고 11명의 목격자'라는 부제로 허 일병의 의문사를 추적했다.
1984년 4월 2일, 허영춘 씨는 군대 간 큰 아들이 첫 휴가를 앞두고 갑자기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곧바로 군대로 달려간 허 씨. 아들의 시신에는 세 개의 총상이 남아있었고 특히 머리 쪽이 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그에게 군 관계자는 아들이 자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한 달 후 군 헌병대의 조사 결과는 허 일병의 자살. 그가 군대 내 괴롭힘으로 힘들어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가슴에 두 방을 쏴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마지막으로 머리에 총을 쏘았다는 것.
그의 아버지는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그는 총성이 두 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사건 후 중대본부에서 물로 젖은 바닥과 문짝에 남은 핏자국을 발견했던 것. 또한 그는 막사 밖에서도 핏덩어리를 포착했다.
하지만 군은 허 일병의 자살을 했다고 확신했고 이 결론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허 씨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밝히겠다고 약속하며 법의학까지 공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1980년대, 군 의문사가 많았던 시절. 당시 군에서 사망한 사람은 한 해에 970명에 달했는데 이는 걸프전의 미 전사자 148명에 비교해도 훨씬 많은 인원이었다. 전쟁도 전투도 없이 한 해에 천 명 가까이 사망했고 그중 자살을 391명.
허 일병의 아버지는 무시와 냉대, 침묵의 나날이 끔찍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군 관계자들의 협박까지 받았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죽은 지 14년이 흐른 어느 날 군사정권하에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이 모여 자식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천막 농성을 펼쳤다.
이에 아버지는 삭발까지 하며 투쟁을 이어갔고 1년이 넘은 422일 만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00년 대통령 소속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만들어지고 허 일병의 죽음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관 김학선 씨는 국방부에 자료를 요청했고 이를 살펴볼수록 의문을 가졌다. 사건 기록철에 모순이 너무 많았던 것. 이에 조사관은 "의도를 가지고 하다 보니 모순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어느 순간 진술과 현장 상황이 바뀐 기록들과 자살이 아니라는 정황들이 곳곳에 드러났던 것. 이에 조사관들은 당시 상황을 알고 있을 사람들을 만나 진술을 부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시 중대본부원들이 허 일병 사망 후 헌병대에 일주일 이상 끌려가 폭행을 당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이들은 허 일병이 자살한 것 같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들은 의문사위의 조사에도 헌병대 수사 기록과 큰 차이가 없는 진술을 유지했다. 이에 조사관들은 다른 소대원 등 200여 명을 더 만나 조사를 했고 그 당시 중대본부 안에서 핏자국을 목격했고 이를 물청소 하는 것을 보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사건 당일 술을 마시던 중대장과 선임 하사 간의 말다툼이 있었고 화가 난 선임하사가 허 일병을 폭행했고 그 과정에서 오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진술을 한 전 상병. 그는 이후 날이 밝고 부대 내의 핏자국을 물청소했고 그 순간 밖에서 두 방의 총성이 들렸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당시 "나도 잘못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공포감"을 지울 수 없었다고.
12번째 조사에서 진술을 바꾼 전 상병. 이후 다른 인물들도 새로운 사실들을 증언했다. 당시 파견 근무 중이던 이 하사도 전 상병과 같은 진술을 했다.
목격자 11명 중 2명이 오발 사고를 목격했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반대의 진술을 하며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선임하사는 "나는 그날 총을 쏜 일이 없다"라며 왜 자신에게 살인자 오명을 씌우냐며 억울해했다. 총을 들긴 했지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
2002년 9월, 의문사위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허 일병의 사망이 자살이 아닌 타살, 오발 사고라고 발표했다. 18년 만에 자살에서 타살로 바뀐 허 일병의 사망.
그런데 이후 국방부는 진상규명을 위해 재조사를 하겠다고 했고 이에 의문사위는 자료를 국방부에 넘겨주고 해체했다. 그리고 3개월 후 국방부는 또다시 허 일병이 자살을 했다며 결론을 뒤집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근거로 타살이라는 주장을 반박한 국방부.
의문사위에 결정적인 목격 증언을 했던 운전병 배 씨와 이 하사도 진술을 번복했고 이에 국방부는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전 상병은 끝까지 자신이 진술을 바꾸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이에 의문사위는 2기를 출범해 다시 재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방부와 부딪히는 일이 있었다. 의문사위가 군 검찰수사관 김 상사가 가지고 있던 어떤 자료를 가지고 가자 김 상사는 자료를 돌려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크게 흥분했던 것.
그 자료의 정체는 D.B.S (더러운 검은 비밀) 파일로 허 일병의 타살 정황들을 모아놓은 자료였다. 2기 의문사위도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발표했고 이에 허 씨의 아버지는 국가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모든 기록을 검토한 법원은 1심에서 허 일병의 죽음은 타살이라며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후 대한민국의 항소로 2심이 진행됐고 2심은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판단했다.
남은 것은 대법원의 판단. 2015년 9월, 최종 선고에서 대법원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라며 초기 수사 부실로 사실을 알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영구 미제 사건이 되어버린 허 일병의 죽음.
대법원 판결 후 10년이 흐르고 다시 만난 허 씨의 아버지. 그는 "자식 잃은 슬픔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라며 아직도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세상 살아보니까 제일 가슴 아픈 것은 자식들을 낳아 먼저 보내는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허영춘 씨는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그 말밖에 할 수 없다"라고 말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울컥하게 만들었다.
올해 4월는 허 일병이 사망한 지 41년이 되는 해. 이제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한 시간보다 그리워 한 시간이 더 길어졌다.
8번의 조사, 3번의 재판. 하지만 아들의 죽음엔 여전히 물음표만 남은 상황.
1980년에서 1992년까지 한 해에 평균 620명이 군대에서 사망했고 최근 5년간도 397명이 사망했다. 1주일에 1명 이상 목숨을 잃고 있는 것.
국방의 의무가 있는 우리나라. 국방의 의무가 국민에게 있다면 국가는 장병들을 건강하게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는 일을 당했다면 그 의문을 푸는 것 역시 국가가 해야 할 의무일 것이다.
부디 앞으로는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그리고 의문으로만 가득 남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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