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일 방송된 '그녀들의 'He' 스토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장혜진, 고규필, 댄서 아이키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팬덤 문화의 원조
때는 1949년 11월, 부산. 한 만삭의 임신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어. 숨이 점점 가빠오고 진통 주기도 짧아지는 게 곧 아기가 나올 분위기야. 그런데, 옆에 있는 남편의 반응이 좀 이상해. 아내한테 "여기서 애를 낳으면 안 되니, 조금만 참으라"는 거야. 근데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냐.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임신부를 에워싼 채 지켜보고 있는 거야. 그때였어!
"응애 응애~"
70년 전 인기가 이 정도야. 얼마나 대단한 스타인지 짐작이 가지? 그럼 공연이 끝난 후에 이 고무신 부대들,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지. 어떻게든 임 배우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극장 뒷문에 진을 치고 있어. 오죽하면 이 극성팬들 때문에 공연장에 몇 시간씩 강제 감금되는 경우가 허다했대. 잠시 후, 소란이 잦아든 틈을 타 살금살금, 임 배우가 극장 뒷문을 빠져나오던 그때였어! 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소녀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는데, 이 소녀들 반응이 좀 이상해.
"언니! 내 언니 억수로 좋아합니데이~"
▲ 신예 국악인의 등장
이런 대스타가 까마득한 신인을 찾아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그런데 종례는, 다음 이어지는 얘기에 더 깜짝 놀라.
"여성 국악인들끼리 단체를 만들 건데... 너도 함께하면 어떨까?"
종례는 그 제안을 바로 승낙했어. 사실 종례도 광주 권번 출신이거든. 종례는 기생이란 말을 듣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대. 예인으로서 자부심도 강한 거지. 그렇게 '여성국악동지회'의 창립멤버가 된 종례는 입단 후 제일 먼저 이름을 바꾸기로 해.
봄 춘(春)자에 꾀꼬리 앵(鶯)을 써서 임.춘.앵. 마치 봄에 지저귀는 꾀꼬리처럼, 목소리가 곱고 청아했거든. 그래서 선배 국악인이 '춘앵'이라는 예명을 붙여준 거야.
▲ 여성국극의 시작
자, 이렇게 춘앵이 마지막 멤버로 이름을 올리면서 총 서른두 명의 여성 국악인들로 이뤄진 동호회가 결성됐어.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다들 예인이잖아. 실력으로 여성 파워를 증명해 보여야지. 멤버들은 여성들로만 이뤄진 창극 무대를 올리기로 해. 고민 끝에 작품도 선정했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유명한 '춘향전'으로. 그때도 '춘향전'은 믿고 보는 히트작 중 하나였어. 전 국민이 다 아는 뻔한 레퍼토리지만 그만큼 친숙한 매력 덕분에 흥행보증수표로 통했거든.
아무리 주연이라도, 성별을 바꿔 연기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 근데, 이럴 때 궂은일은 막내한테 돌아가곤 하지. 여기서 막내는 춘앵이잖아. "춘앵아.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해보자. 내가 도와줄게!"라며 하늘 같은 박녹주 선배의 부탁이야. 거절할 수 있겠어? 결국 이몽룡 역엔 춘앵이 낙점됐어.
춘앵은 기왕 하게 된 거, 젊고 패기 넘치는 이몽룡을 제대로 한 번 보여 주자고 결심했어. 그런데 이게 결심만 한다고 되는 일일까? 지금껏 20년 넘게 여자로 살았잖아. 아무리 연기라도 갑자기 남자 흉내를 내는 게 쉽진 않겠지. 사실 춘앵은 키가 158cm야. 남자라 하기엔 체구가 좀 작은 편이지? 그래서일까. 춘앵은 유독 덩치에 집착을 했다고 해. 마치 양복 패드를 넣은 것처럼 어깨를 크게 부풀리고, 신발 밑창엔 고무를 잘라 여러 겹 덧붙였어. 키가 커 보이려고. 심지어 매일 밤에는 우동을 먹었대. 일부러 살을 찌우려고 한 거야.
근데 덩치는 키울 수 있다 쳐. 진짜 문제는 목소리야. 목소리를 곱게 다듬는 데엔 날계란이라도 있지,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무슨 수로 내겠어. 게다가 예명이 '춘앵'일만큼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를 가졌잖아. 이게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실제로 남역을 맡아 연기했던 여성국극 배우분들에게 물어봤어.
그러니까 여자들끼리 공연을 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뭐야~ 똑같잖아!" 하며 실망을 한 거지. 결국 야심 차게 쏘아 올린 여성국극의 신호탄은 흥행 대참사라는 흑역사를 안게 됐어.
▲ 임춘앵과 그 일행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면 춘앵이 아니지. 춘앵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이제 똑같은 창극은 안 할 거야. 내가 별천지 같은 오페라, 제대로 된 여성국극을 보여주겠어!"
그날 이후 춘앵은 파격적인 행보를 시작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성국악동지회를 탈퇴했어. 그리고는 자신만의 국극단을 새롭게 꾸리고, 새 단체명도 정했어. 춘앵이 정한 이름은 '임춘앵과 그 일행들'. 꼭 서태지와 아이들 같지? 그렇게 그녀는, 여성국극의 새로운 신호탄을 쐈어.
그렇게 진진을 비롯해 실력 있는 여성 국악인들을 캐스팅한 춘앵은 이번엔 '원우전'이라는 한 남자를 영입해. 이분은 당시 보기 힘든 무대장치가야. 병풍만 세워뒀던 무대를 입체형으로 바꾼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춘앵은 옥중화 공연이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한 이유를 밋밋한 무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이번만큼은 화려한 무대와 볼거리로 관객들의 눈을 제대로 사로잡겠다고 결심한 거야. 그럼 화려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확실히 시대를 앞서갔다는 느낌이 들지? 이뿐만이 아냐. 춘앵은 멜로디 파트도 전면 수정했어. 국극 자체가 판소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잖아? 그러다 보니까 창 부분의 가사가 좀 어렵게 느껴졌대. 그래서 좀 더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도록 일종의 가요 형식으로 창을 편곡한 거야.
이렇게 배우, 무대, 음악까지 새롭게 완성이 됐어. 그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걸까? 아니야. 제일 중요한 하나가 남았어. 바로 여심저격!
춘앵은 작품을 고를 때부터 남자주인공에 대한 3가지를 조건을 뒀어. 첫째! 남주는 충절과 신의를 지키는 용맹스러운 왕 혹은 왕자여야 한다. 둘째! 남주는 가무에 능하고 무예를 겸비해야 한다.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해. 남주는 여성을 존중하고 사랑에 헌신하는 로맨티시스트여야 한다.
▲ 임춘앵 왕자님의 시대
그렇게 여성국극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어. 단원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있고 다른 국극단은 이미 해산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와. 잠시 후, 한참을 고민하던 춘앵이 단원들을 불러 모아 광주로 가자고 했어. 왜 하필 광주였을까? 아까 춘앵이 광주에 있는 권번 출신이라 했잖아. 게다가 광주엔 춘앵의 특별한 지인도 있었어. 바로 춘앵의 연인, 신대우. 춘앵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았는데 춘앵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할 만큼 신대우를 믿고 의지했다고 해.
이 신대우의 도움으로 광주에 온 춘앵은 차근차근 계획했던 일을 꾸려나가기 시작해. 사실 춘앵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지금 서울에선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 그래서 광주에 내려가 권번 출신의 예인들과 함께 다음 작품을 준비할 계획을 세운 거야.
시간은 흘러 1952년 1월 25일. 드디어 춘앵의 공연 날짜가 잡혔어. 근데 지금은 전시 상황이잖아. 북쪽에선 서로 총칼을 겨누고 남쪽으론 연일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있어. 이런 불안한 시국에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이 있었을까? 있었어.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공연 첫날 광주극장에는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극장이 무너질 것 같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소문은 금방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가는 곳마다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 '김진진 회고록' 中에서 -
"어허이 꽃이 피네 승전고 두리둥둥 꽃이 피네. 봉세로세 황세로세 청사랑 홍랑은 봉새 황세. 삼세에 잊혀질 사랑일세. 맞닿은 칼날을 내던지고 어화 두 집에 담을 텄네. 어허이 만백성아 사랑의 동아줄에 달려 살자."
40년 가까이 나라를 잃었는데 이제는 같은 민족까지 잃어야 했던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거야.
▲ 황금기를 맞은 여성국극
그로부터 1년 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이 끝이 나고 드디어 휴전이 선포됐어. 이맘때 춘앵은 단원들과 함께 상경을 하게 돼. 그사이 늘어난 인기 덕분일까? 어느새 임춘앵 국극단의 단원수는 40명을 훌쩍 넘어섰어. 그럼 다 같이 함께 연습할 장소가 필요했겠지? 춘앵은 거금을 들여 종로 돈의동의 한 한옥집을 사기로 해. 근데 방이 무려 7개에 큰 마당까지. 이건 뭐 거의 대궐이야.
근데 이 집 다 좋은데 딱 하나 문제가 있어. 바로 민원.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사는 집이잖아. 팬들이 매일 같이 대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거야.
"낙원동 그 골목이 큰 기와집이었는데 경찰들이 와서 그냥 쫓고 그래도 소용없어. 어디 가서 숨어 있다가 또 오고 바글바글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막 욕지거리 하면서 빨리 안 가냐고. 임춘앵이 때문에 우리가 못 살겠다고. 파출소에 얘기해도 아 팬들이 와서 그러는 걸 어떻게 해."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 비극의 시작
신대우는 돈의동 숙소에서 사업부를 담당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 건강이 악화됐고 갑작스레 숨을 거둔 거야. 오랜 시간 춘앵이 의지했던 유일한 사람이야. 연인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춘앵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지만, 이땐 아무도 알지 못했어. 이건 비극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임춘앵 국극단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어. 이런 와중에 또 한 통의 비보가 전해져. 이번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야. 계속되는 악재에 결국 춘앵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해. 신경쇠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술에 의지하는 날이 늘어가. 그리고 결국, 일이 벌어졌어.
가까스로 잡은 지방 변두리 극장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날이야. 남주를 맡은 춘앵이 거울을 보며 분장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탁! 붓을 내려놔. 그리고는 후배 배우에게 이런 말을 해.
"오늘은 네가 올라가라. 나 오늘 무대에 안 선다."
이 말을 끝으로 분장실을 나선 춘앵은 다시 무대로 돌아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극장에서는 난리죠. 포스터에는 임춘앵인데 왜 후배냐, 안 된다… 그러고 난리가 나고 그러면 날짜를 안 줘 그다음부터는. 그러면 (춘앵)아줌마는 너무 힘드니까 그냥 후배를 시키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다 보니까 차츰차츰 이제 이미지가 안 좋잖아요."
-조영숙, 여성국극 배우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벌인 이날의 돌발 행동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수많은 루머를 만들어 냈어. 마약을 한다는 소문부터, 심지어 사망설까지. 화려한 무대 위, 위풍당당했던 백마 탄 왕자님은 그렇게 무너져 가고 있었어.
"국악제의 명미로서 인기가 비등한 임춘앵은 과연 별세하였는가? 그간 약 3개월간 무대에 나타나지 못함으로 해서 팬들 간에 별세하였다는 소문과 함께 구구한 억측과 풍설이 떠돌았는데 최근 본지에서는 이를 확인하여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요양 중인 인천 병사를 방문하였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인기라는 게 영원할 수는 없다지만, 세상 모두가 나에게 등을 돌린 것 같은 기분. 춘앵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은 이 무렵 춘앵의 어린 조카들이 태어났다는 거야. 왜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웃을 일들이 생기잖아. 춘앵은 올케인 선엽 씨의 두 어린 딸들을 참 예뻐했다고 해. 이런 가족들의 따뜻한 응원 덕분일까? 춘앵은 다시 용기를 냈어. 새로운 단원들을 물색하고 간간이 공연도 이어갔어.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62년 1월 5일. 정부는 전통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법'을 발표해.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문화재를 선정해 국가가 관리하도록 한 거야. 연극, 음악, 무용 등 전통 공연 예술 대부분이 무형문화재로 선정이 됐어. 그런데, 여성국극은 제외가 됐어. 왜 제외를 한 걸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있어.
"암탉이 울면 그 집이 망한다. 여자가 설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구한말 민비가 정권을 집단 농락하더니 나라가 망하였다. 여성극단의 출연은 한마디로 말하면,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뿐이며, 속죄할 수 없는 죄과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창극사 연구' 中에서 -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어느덧 1968년 겨울.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헤집고 늦은 밤, 영숙의 집 앞에 누군가 찾아와. 문 앞엔 초라한 행색의 한 여자가 서 있어. 춘앵이었어.
"아니 선생님, 이 밤에 어쩐 일로... 추운데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러자 춘앵이 머뭇대며 입을 열어.
결국 영숙은 돈을 드렸고 그게 영숙이 본 춘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해. 그로부터 얼마 뒤 신문에 짤막한 기사 하나가 실렸어.
"우리나라 여성국극계의 1인자 임춘앵 씨가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뇌출혈로 별세했다. 향년 52세."
▲ 다시 무대에 선 배우들
지난 2000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20세기를 빛낸 대한민국 여성 10인을 선정했어. 독립운동가 유관순, 최초의 여성법관 이태영 변호사,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들 사이에 이분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어. 바로 임춘앵 선생님. 하지만 이 대단한 명성에 비해 임춘앵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국악인이란 타이틀에 비해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지.
그간 임춘앵이란 이름 앞엔 언제나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다녔어.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 예술가', '부와 명예를 거머쥔 전무후무한 여류 국악인', '만인의 사랑을 쟁취한 최고의 남장 배우'. 하지만 그녀가 진정 원했던 수식어는 이런 게 아니었을까?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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