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가족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2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Bring my father home'이라는 부제로 1969년 일어난 민간여객기 납북 사건을 추적했다.
일 때문에 강릉으로 떠났던 남편을 마중 나간 순남 씨. 그런데 남편은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순남 씨는 충격에 빠졌다.
강릉 공항을 떠나 김포 공항으로 향하던 여객기가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향했다는 것. 특히 이 여객기는 승무원 포함 총 51명을 태운 민간여객기라 그 충격은 더 컸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두 번째 하이재킹에 납북된 피해자들의 가족은 제발 무사히 가족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했다.
그런데 당시 여러 사건들로 인해 남북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라 조속한 피해자들의 송환이 어려웠던 것.
그리고 여객기의 납북 다음날 북한 방송에서는 해당 여객기의 조종사들이 자기 의사로 북으로 왔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어 12월 15일, 사건 발생 나흘 뒤 우리 경찰은 수사 결과를 대대적으로 발표했는데, 강릉 자혜병원 원장 채헌덕과 부조종사 최석만, 조창희 등 3명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이중 채헌덕이 주범, 조창희는 직접 권총을 휴대한 하수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채헌덕의 고향이 함경남도이며 일가족 중 북에 남아있는 이가 여럿이고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병원을 차린 것을 의심하며 그를 고정간첩으로 추정했다. 또한 조종기술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같은 전투비행단 출신인 부조종사 최석만을 포섭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추정에 불과한 내용들 뿐이었고 이에 경찰을 향해 온갖 질타를 보냈다.
그리고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납북자들의 안전한 송환이기에 공분은 커졌다.
납북 직후 각 부서들을 납북자들의 송환을 위해서 국제적 여론 조성으로 북한을 압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은 UN 측의 송환 요구에 당신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조속한 송환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 등 여러 행동에 나섰다. 그러자 정부는 모든 인원에 대한 송환을 다시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설날을 얼마 앞둔 2월 3일, UN은 북한에 강력하게 납북자들의 송환을 촉구했다. 그러자 북한은 승객들 중 돌아가길 원하는 승객들은 곧 일방적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1970년 2월 14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 갑자기 버스 한 대가 등장했고 그곳에서 납북됐던 51명 중 39명의 승객들이 내렸다.
돌아온 납북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모두 밝혔다. 당시 여객기에 타고 있던 조창희의 단독 범행으로 납북되었고, 그동안은 북한은 피해자들에 대한 성분 조사를 시작으로 사상 교육, 우상화 교육을 시작했던 것.
그뿐만 아니었다. 북한은 자신들에 반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각종 고문을 가하고 약물까지 투입했던 것. 이에 납북된 피해자 중 손호길 씨는 고문 후유증까지 앓게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납치범 조창희는 북에서 파견된 간첩이 아니라 대한민국 출생의 인물이었다. 육군 헌병으로 근무하기도 하며 속초 CID 대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전역 후 북한에 포섭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그는 처와 3남 1녀를 둔 가장이었지만 가족들을 모두 남겨둔 채 홀로 북한으로 떠났다.
북한의 사상 교육에 맞섰던 MBC 황원 PD. 그는 북한 체제의 허상을 반박해 어딘가로 끌려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왔다.
그 후에도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인민군들에게 끌려갔고, 이후로 그를 본 이들은 없었다.
황원 PD를 포함한 11명의 미귀환자. 그중에는 납치 주범으로 오해받은 병원 원장 채헌덕 씨부터 공범으로 지목됐던 부기장 최석만 씨 등이 포함되었다.
납북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누명은 벗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이에 가족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1979년, 납북 피해자 가족회를 이끌던 성충영 씨가 세상을 떠나며 가족회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그렇게 미귀환자들은 점점 잊혔다.
그리고 2001년 미귀환자 중 1명이었던 승무원 성경희 씨가 평양 이산가족 상봉에서 가족들과 32년 만에 재회했고 이후 승무원 3명의 생존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에 미귀환자 가족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살아만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
황원 PD의 아들 인철 씨는 미귀환자 가족회를 다시 만들고 미귀환자 송환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고 2006년 북한의 답변이 도착했다. 북한은 확인 불가능이라는 답을 했고 이에 인철 씨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에 후속조치를 문의했지만 정부는 KAL기 납북자는 이산가족으로 분류되어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밝혀 인철 씨의 절망은 더욱 커졌다.
한 외교부 서기관은 그에게 "오래전 일을 가지고 지금 와서 그러냐 혹시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라고 비난해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
WGEID에 아버지의 생사 여부 확인을 요청한 인철 씨. 이에 북한은 2년이 지난 뒤 답을 보냈다. 북한은 "언급된 사건은 강제적 실종 사건이 아니다. 공화국에는 강제적 도는 비자발적으로 실종되거나 자기 의사에 반하여 억류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은 북한에 대한 적대 세력의 음모이므로 실무그룹의 고결한 인도주의적 실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믿기 힘든 답변을 해온 것이다.
인철 씨는 UN 측을 통해 재차 송환 요구를 하였으나 북한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미귀환자들은 자의에 의해 북한에 머무는 것이며 이들의 생사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슈퍼맨이라 불리는 이에게서 전화가 한 통이 걸려왔다. 그는 수천 명의 북한 주민을 탈북시킨 인물로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됐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이에 인철 씨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겠다고 하면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노력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난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겠다"라고 했다. 대신 정말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후 2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며 걸려온 전화. 이에 인철 씨는 아버지가 자신이 어릴 때 지어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수화기 너머의 남성은 과거 자신이 지어준 이름을 언급했고, 이는 바로 그가 인철 씨의 아버지라는 증거였다.
44년 만에 듣게 된 아버지의 목소리. 황원 PD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에 인철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탈북에 실패한 것이다.
이후 아버지의 송환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한 인철 씨. 이에 2020년 WGAD는 이 사건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인권적인 차원에서 그를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며 북한에 송환을 요구했다.
이는 모두 인철 씨가 혼자 이뤄낸 성과. 이에 인철 씨는 정부와 국제 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랐다.
만약 가족을 다시 만난다면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아버지를 닮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미귀환자의 아들은 "어머니가 제일 고생 많이 하셨다. 아버지 부재로 인해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다"라며 슬퍼했다.
그리고 순남 씨는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춤을 출 거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잘 성장했다고 자랑도 하고 싶다"라고 밝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울렸다.
지난 2011년 미귀환자 가족회에서 진행한 거리 캠페인에 어떤 이는 왜 42년이 지나서야 목소리는 내냐고 물었다. 이에 인철 씨는 "이건 42년 만의 첫 번째 목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미귀환자의 가족들은 가장 두려운 것이 잊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한 가족은 "반세기가 지나니까 이 이야기를 아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가족이 납북되어서 소식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고 그런 세월을 50년 이상 보냈다. 우리 같은 사람도 있단 걸 꼭 한번 살펴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다"라고 말했다.
비행기를 탑승한 승무원과 승객들은 이륙 후 반드시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1969년 하이재킹 당했던 이들 중 11명은 아직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방송은 이들이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미귀환자 가족들만의 싸움이 아니도록 모두가 함께 마음을 모아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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