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4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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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아나운서 총으로 위협해 혁명방송을…5.16군사정변, 어떤 저항도 없었다

강선애 기자 작성 2024.05.17 13:41 조회 1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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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6일 방송된 'D데이 H아워-1961년 5월 16일 05:00'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SBS 이인권 아나운서,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오종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방송국을 습격한 무장 군인들

오늘 이야기는 1분 1초가 급박했던 어떤 'D-DAY(디-데이), H-HOUR(에이치-아워)'에 관한 이야기야. D-DAY는 '작전 개시일', H-HOUR는 '공격 개시 시간'을 뜻해. 한마디로, 작전 개시 시간이 다 됐다는 거야. 대한민국의 역사가 뒤바뀐 그날의 D-DAY, H-HOUR에 대해 이야기해줄게.

때는 1961년. 아직 프로스포츠가 없던 이 시절 최고 인기 스포츠는 고교야구였어. 청룡기, 황금사자기 등 대회도 많아. 이 고교야구 붐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있어. 바로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야. TV가 아니라 라디오로 중계하던 시절이었거든. 그때 아주 유명한 아나운서가 KBS 소속 박종세 아나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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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자 아나운서는 최고의 인기스타야. '오빠부대'의 원조였대. 인기 아나운서가 숙직하는 날에는, 방송국으로 밤참을 준비해 오는 아가씨도 있었다고 그래. 지금의 '조공' 같은 거지.

1961년 5월 15일이야. 이날도 야구 중계가 있었어. 몇 시간동안 소리 지르며 중계를 했더니, 아주 녹초가 됐어. 근데 퇴근을 못해. 이날은 마침 박종세 아나운서의 숙직 날이었거든. 그렇게 심야방송까지 마치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숙직실에 들어갔어. 너무 피곤해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스르륵 잠이 들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어. 방송국 수위였어. 막 소리를 지르며 깨우는 거야.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야. 대충 옷을 걸치고 문 밖으로 나갔어. 그런데, 방송국에 헌병들이 쫙 깔려있어.

"지금 정체 불명의 군인들이 김포 방면에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방송국을 접수하려고 할 겁니다. 대비해 주십시오."

헌병들 말로는, 북한군 같기도 하고 반란군 같기도 한데 아직 정확하게 파악을 못 했대. 헌병대는 자신들이 방송국을 지키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했어. 1961년이면, 6.25 전쟁이 끝난지 8년 밖에 안됐던 때야. 아직 전쟁의 공포가 남아있던 시기야. 그러니 너무 무서운 상황이지.

다른 야간 근무자들과 걱정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헌병들이 급하게 트럭에 올라타. 그리고 그대로 사라졌어. 우릴 지켜준다더니, 어디를 가는 걸까? 그렇게 헌병들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군 트럭들이 남산 쪽으로 몰려와. 그땐 KBS가 남산에 있었어. 이 트럭에서 군인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방송국 담을 뛰어 넘으면서 일제히 총을 발포했어. 다행히 총구는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총성 소리에 모두가 겁을 먹었어.

바로 그때야. "모두 나를 따라와!"라며 누군가 나섰어. 함께 숙직 중이던 도상보 PD야. 도PD는 6.25 때 수색중대장으로 복무했어. 그래서 별명이 '도 대위'야. 이 순간 믿을 사람은 도 PD 밖에 없어. 박종세 아나운서와 사람들은 우르르 도 PD를 따라갔어. 1층 아나운서실을 지나 보도실로 뛰어 들어갔어. 보도실 한쪽 구석엔 칸막이로 나뉘어 있는 텔레타이프실 이라는 좁은 공간이 있었거든. 외신 뉴스가 전송돼서 출력되는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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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텔레타이프 기계 뒤로 몸을 숨겼어. 도PD는 다들 여기서 기다리라고, 자기가 나가서 바깥 상황을 살피겠다며, 창문을 훌쩍 뛰어 나갔어. 그런데 그 순간, 창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그리고 다시 조용해. 아무래도 도PD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아.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어.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 걸까.

박종세 아나운서는 급히 양복 상의를 벗었어. 아나운서 신분을 들키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왜냐하면 북한이 6.25 때 언론인들을 납치해 갔는데 그 중에 아나운서들도 있었어. 양복 상의 주머니에는 신분증과 출입증이 있었어. 꺼낼 여유도 없이 양복 채로 둘둘 말아서 창 밖으로 휙 던져 버렸어. 바로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렸어.

누군가 텔레타이프실 문을 두드렸어. 모두가 숨죽였어. 아무 소리가 없자, 누군가 잠긴 문을 막 흔들어. 그러더니 또 잠잠해. 그리고 문 밖의 그 누군가가, 깜짝 놀랄 말을 꺼냈어.

"거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

콕 짚어서 박종세 아나운서를 찾는 거야. 근데 이 말을 듣고, 박종세 아나운서는 안도감을 느꼈어. 반말로 윽박지르는 말투가 아니라, 아주 정중한 톤의 목소리였거든. 일단 자기를 해칠 거 같은 목소리는 아니야. 박종세 아나운서는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나갔어. 문 밖에는 총을 든 군인 세 사람이 있었어. 군복의 부대마크를 보니, 북한군이 아닌 우리나라 공수부대야. 군인들은 박종세 아나운서에게 따라 오라 했어.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대위 두 사람이 기관총으로 박종세 아나운서의 등을 쿡쿡 찔러. 박종세 아나운서는 그들을 따라 2층 계단 쪽으로 가.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 서있어. 모자에는 별 2개가 반짝여. 투스타가 악수를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어.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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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 그의 나이는 45세였어. 제2작전사령부는 대한민국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로, 본부는 대구에 있었어. 그는 대체 왜 이 새벽에 군대를 끌고 서울의 방송국에 나타난 걸까.

"지금 나라가 너무 어지럽소. 그래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05시에 방송을 해줘야겠소."

혁명방송을 하라는 거야. 지금 군인들이 정권을 뒤엎는 혁명을 일으키는 중이고,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방송을 박 아나운서가 해달라는 거야. 그것도 새벽 5시 정각에 맞춰서. 지금 날짜는, 자정이 지나 5월 16일이야. 그래 맞아. 바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거야.

오늘의 이야기는, 63년 전 군인들에 의해 나라가 뒤바뀐 숨 막히는 그날의 이야기야.

▲ 새벽 5시, 혁명방송을 하라

1961년 5월 16일 새벽 4시 30분. 박종세 아나운서는 완전 '멘붕'이야. 만약 시키는 대로 방송을 했는데 쿠데타가 실패하면? 그렇다고 그런 방송 못한다고, 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말할 수 있어? 이건 사실상 제안이 아닌 명령이야.

근데 반란군 쪽에서도 문제가 생겼나봐. 방송에서 읽어야 할 혁명공약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야. 쉽게 말해, 방송 대본이 없는 거지. 당시 혁명공약을 방송국으로 가져오기로 한 사람은, 당시 예비역 중령이었던 김종필이야. 맞아 그 'JP' 김종필이야. 김대중, 김영삼과 함께, '3金(김) 시대'의 한 축을 맡았던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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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김종필은 방송국을 사전답사했어. 김종필의 중학교 후배 중 한 명이 방송국 작가로 있었거든. 방송국에 후배를 만나러 와서, 숙직실의 위치를 물었대. 방송국 견학 온 사람이 방송국 숙직실을 찾는 게 좀 이상하지? 다 계획이 있었던 거지. 김종필은 안국동에서 인쇄된 혁명공약문을 들고 아슬아슬하게 방송국에 도착했어. 박정희 소장은 박종세 아나운서에게 이 혁명공약문을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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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이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품을 진작시킨다.

6.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혁명공약문 中

이 혁명공약문을 받아든 박종세 아나운서는 머리털이 쭈뼛 섰대. 반란군과 한 배를 타게 된 거야.

시간은 어느덧 새벽 5시가 되기 직전. 근데 또 문제가 생겨. 박종세 아나운서가 엔지니어가 없이 혼자서는 방송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공수부대 장교가 총구를 머리에 겨누며 위협을 가해. 아까 총소리를 듣고 엔지니어들이 방송국 밖으로 도망쳤거든.

박정희 소장은 당장 엔지니어 찾아오도록 지시했어. 그리고 시간은 점점 흘러. 새벽 5시가 되기 5분 전이야. 과연, 방송은 제대로 나갔을까?

▲ D데이 H아워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서, 하루 전인 1961년 5월 15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박정희 소장의 자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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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해.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그리고 거사를 모의하는 군인 몇 명이 모여있어. 김종필은 3개월 전에 군대에서 쫓겨났어. 별 3개 이상 장군들의 퇴진을 요구하다가 강제 예편 당했어. 당시 김종필은 민간인 신분인 거지. 박정희 소장은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발령이 났어. 한마디로 좌천된 거야. 고민에 빠져있던 박정희 소장이 입을 열어.

"D-DAY, H-HOUR는 5월 16일 새벽 03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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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일으킬 날과 시간을 정한 거지. 사실 이들의 D-DAY는 이미 2번이나 연기된 상태야. 박정희 소장은 꽤 오래 전부터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는 군 장교들을 만나면 슬며시 이런 말을 꺼냈어.

"임자, 요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봐요?"

쿠데타에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떠보는 거야. 이 얘기를 직접 들은 사람을, '꼬꼬무'가 어렵게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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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소장에게) 첫 인사를 가서 인사를 하니까, 그렇게 찰 수가 없어. 냉랭해. '임자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거야? 지금 나라가 이리 가다가는 도탄에 빠지고 급기야는 공산화돼. 공산화되는 걸 막자는 거 아니야. 이대로 놔두면 나라가 적화되지 않겠나. 그러니 이걸 막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그거 할 말이 없더라고. 할말이 없어. '알았습니다' 무릎 딱 꿇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명해 주십시오'"
-김용채, 당시 육군 대위, 쿠데타군에 가담

김용채 대위가 육군 정보참모부 도서실장직을 맡고 있을 때야. 당시 중령이었던 김종필이 도서관에 오면 주로 찾는 책들이 있었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터키 군부 혁명, 이집트 혁명 등 각국의 혁명사가 기록된 책들. 외국의 혁명 사례를 연구한 거야. 그리고 물밑에선 뜻을 같이할 장교와 부대들을 포섭했어. 박정희 소장은 육사 2기였는데, 육사 5기, 8기 등 젊은 장교들을 만나 세력을 모았어. 김종필도 육사 8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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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꾸려진 쿠데타의 핵심 부대야. 수색의 30사단, 부평의 33사단, 김포의 공수부대, 포천 6군단 포병대대, 김포 해병여단. 근데 해병대는 육군 소속이 아니잖아? 어떻게 함께 하게 된 걸까? 놀랍게도, 당시 해병대는 따로 단독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당시 해병대 김동하 소장과 이하 중령들은, "우리가 나서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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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하 소장은, 박정희 소장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야. 같은 뜻을 품고 있다는 걸 알고, 해병대도 힘을 합치기로 한 거야.

쿠데타의 기본 계획은, '비둘기 작전'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거야. 1961년은 4.19 혁명의 1주년이 되는 해야. 4.19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던 민주 혁명이지. 1주년에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벌어질 것에 대비해 정부와 군은 진압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그 작전명이 '비둘기 작전'이었어. 근데 이걸 역으로 이용하자는 건?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군인들이 자연스럽게 나섰다가, 쿠데타 군으로 돌변한다는 작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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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4월 19일이 됐어.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세상이 너무 평온해. 시위가 열리긴 했는데, 침묵 시위였어. 경건한 분위기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형식이었어. 과격한 시위가 아니였어. 쿠데타 군의 예상이 빗나간 거야. 어쩔 수 없이 D-DAY를 변경했어. 두번째 D-DAY는 5월 12일이야.

D-DAY 직전, 쿠데타 세력 중 한 명이 동료를 포섭하려 나섰어. 그는 포섭하려는 동료에게 "나라가 걱정이다", "이 정권 되겠냐" 라며 이야기를 꺼냈어. 근데 이 이야기를 꺼낸 장소가, 군인들이 타는 통근버스 안이었어. 듣는 귀가 많은 곳이지. 게다가 이 얘기를 들은 동료가 느끼기엔 단순한 푸념 같지가 않았대. 그래서 이 동료는, 방첩대에 이 사실을 밀고했어. 방첩대는 군대 내 정보기관이야. 훗날 이름이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로 바뀌는 곳이야. 한마디로 계획이 또 누설된 거야. 그래서 또 거사일이 연기됐어.

계속되는 계획 연기, 박정희 측 분위기가 안 좋아. 신당동 박정희 자택 안의 분위기가 그래서 더 무거웠던 거야. 하지만 이번엔 결심이 확고해.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D-DAY, H-HOUR의 변동은 없다"며 거사를 강행할 뜻은 내비쳐.

그런데 아까부터 박정희 소장 집 앞에 지프차가 서있어. 헌병들이야. 지금 헌병들이 박정희 소장 집을 감시하고 있는 거야. 계획이 또 누설됐다는 거지. 헌병을 보낸 사람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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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이면, 육군의 최고지휘관이야. 육군 최고지휘관에게 쿠데타 첩보가 들어간 거야. 근데 이 상황에서 쿠데타를 강행한다고? 비밀을 들킨 자와 비밀을 아는 자. 이 둘의 선택이 과연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까. 먼저, 장도영 총장의 시점으로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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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자 VS 막아야 하는 자

1961년 5월 15일 밤 10시경, 장도영 총장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급히 찾아와. 30사단장 이상국 준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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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사단은 이미 박정희 소장에게 포섭된 곳인데, 정작 사단장은 그 사실을 몰랐어. 근데 30사단 내에서 배신자가 생긴 거야. 30사단이 사단장 몰래 쿠데타군으로 출동할 계획이라고 보고가 들어간 거야. 이 소식을 들은 장도영 총장은 박정희 소장을 미행하라 명령하고, 수사관들을 신당동으로 급파해. 그리고 다른 부대는 문제가 없는지 육군본부에 연락했어. 그런 과정을 통해 이날, 서울지구 부대들이 야간훈련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총장이 모르는 야간훈련이 어딨어?"

서울 부대의 야간 훈련은 장도영 총장도 처음 듣는 이야기야. 공수부대는 한강 모래사장에서 야간 강하 연습을 실시할 거고, 부평 33사단도 야간 훈련을 할 예정이래. 훈련은 연막이고, 쿠데타 작전을 시작하려는 거지. 장도영 총장은 부랴부랴 이 수상한 훈련을 막기 시작해.

장도영 총장은 여기저기 연락하며 훈련을 취소시켜. 30사단, 33사단 모두 출동을 못하도록, 사단장들이 직접 부대를 장악하라고 명령했어. 그런데 잠시 후 또 새로운 보고가 들어와. 장교 20명이 영등포 제6관구사령부에 모이고 있대. 야간훈련을 감독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이 6관구사령부는 박정희가 쿠데타군의 첫 지휘소로 정한 곳이었어. 박정희 소장은 아직 자택에 있는 상황이고, 그 아래 장교들이 먼저 모여있던 거지.

참모총장이 거사 계획을 알게 됐고, 실행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박정희 소장 측도 곧 알게 됐어. 그래도 계속 진행시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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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혁명은 실패하면 죽는 거 아니야? 죽음 각오 안 하면 혁명 못 하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내가 집사람보고 새벽 2시에 일어나 가지고 깨웠어. 애들이 어릴 때 아니야. 아들 삼형제, 딸 하나인데. 어릴 때인데, 애들 누워있는 걸 보면서, '내가 혹시 오늘 나가 가지고 애들을 키우지 못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 무슨 얘기냐고. 그래서 '나중에 다 알게 될 텐데, 내가 혁명을 한다' 그러니 '혁명이 뭔데?' 그래. '나라를 뒤집는 거야'"
-김용채, 당시 육군 대위, 쿠데타 군 가담

그렇게, 쿠데타 작전이 시작됐어. 박정희 소장은 김종필 예비역 중령 등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신당동 집을 나서. 그러자 감시하던 지프차가 따라 붙어. 박정희 소장이 문래동 6관구사령부에 도착해. 그곳에는 혁명군 장교들과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온 헌병들이 뒤섞여 있어. 박정희 소장은 헌병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여러분, 우리는 4.19 혁명 후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나라 꼴입니까? 동지들도 이제부터 구국혁명의 대열에 서서 각자 맡은 임무에 전력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이 말에 진압하러 온 헌병들은 설득이 됐어. 쿠데타군을 해산시키러 간 헌병들이 오히려 쿠데타 장교들과 합류한거야. 장도영 총장은 다급해졌어.

사실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은, 그간 군 내부에 파다하게 퍼졌어. 그럴 때마다 장 총장은 아니라고, 박 소장이 모함을 받는다고 옹호를 해 왔어. 얼마 후, 6관구사령부에 있던 박정희 소장과 장도영 총장이 전화 연결됐어. 장 총장은 박 소장한테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엄포를 놔. 그때 한 장교가 장 총장에게 편지 한 통을 들고 왔어.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된다면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5월 16일 소장 박정희."

계획 취소는 없다는 거야. 사실 박정희 소장도 마냥 자신만만한 게 아니야. 포섭했던 30사단, 33사단이 장 총장의 명령으로 출동을 할 수가 없는 상태야. 남은 건, 해병대와 공수부대, 포병대 뿐이야. 이 부대들은 출동할 수 있었을까?

▲ 한강 다리 위 대치, 이상한 명령들

이 시각, 해병대 제1여단. 김포에 위치해서 서울 진입에 유리해. 당시 해병 1여단 2소대 소속 조봉인 병장은 제대를 4개월 남긴 말년 병장이었어. 이런 거대한 사건이 일반 사병들의 시선에선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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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에 있는 포항에 가야만 훈련을 하는데, 김포 오면 훈련이라는 게 없어요. 전방이니까 훈련을 할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오후 4시쯤 되니까 훈련을 한다고. 훈련 나가야 되는데 공포탄을 안 주고 실탄을 주더라고요. 그전엔 훈련이면 공포탄을 주거든요. 실탄은 쏘면 죽잖아요. 맞으면. 눈치는 좀 챘죠. 무슨 일이 있구나…"
-조봉인, 당시 해병 1여단 소속 병장

당시 해병대 제1여단은 김포 지역의 최전방 경계 임무를 맡고 있었어. 김포는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북한군이 20~30분만에 걸어서 남쪽으로 넘어올 수 있는 지역이야. 이런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는 전방부대를 빼내서 훈련을 한다? 게다가 실탄까지 지급하고?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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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죠. 이상해도 말할 사람이 똑 같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물어봐도 똑같은데 답변이."
-조봉인, 당시 해병 1여단 소속 병장

사실을 모르는 일반 사병들은 이런저런 짐작만 할 뿐이야. 준장의 명령에 해병대 병력 1,500명 정도가 트럭에 올라 탔어. 조봉인 병장이 탄 트럭은 제일 앞, 선두 트럭이야. 깜깜한 새벽에 어둠을 뚫고 차량들이 출발해. 50여대의 군용 트럭은 헤드라이트도 끄고, 차 소리가 안 날 정도로 천천히, 서울을 향해 접근했어. 그리고 염창교를 지날 때쯤, 별 두 개를 단 육군 소장을 만나.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박정희 소장이야.

깊은 밤, 사방이 고요해. 들리는 거라고는 한강 물소리 뿐이야. 해병대를 이끄는 김윤근 준장이 경례를 올려. 해병대가 선봉에 서고, 출동이 늦었던 공수부대가 그 뒤를 따라. 그리고 같은 시각,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해병대와 공수부대 병력이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 장 총장은 헌병 출동을 명령해.

"병력을 카빈으로 무장시키고, 군용 트럭 여덟대 동원해서 한강 다리를 봉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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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한강 다리는,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하나 뿐이야. 헌병은 트럭을 여덟 팔자(八) 모양으로 배치해서, 3중 바리케이드를 쳤어. 박정희 소장과 해병대, 그리고 공수부대도 한강인도교에 도착해. 이때 시각이 5월 16일 새벽 3시 20분. 한강인도교에서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만난 거야.

당시 강북 쪽에는 육군본부, 중앙청, 청와대 등 주요시설들이 다 있었어. 쿠데타군은 한강을 건너가야 하고, 진압군은 그걸 막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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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총장님의 명령에 따라 어떤 부대의 통과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불응하면 사격이니 철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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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는 부대가 아니다. 우리는 해병이다. 빨리 장애물을 철거하라."

헌병대와 해병대 양 측이 한 치의 양보도 없어. 잠시 후, 헌병대가 먼저 움직였어. 헌병대가 트럭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켰어. 해병대 측에선 눈이 부셔서 앞이 잘 안 보여. 헌병대 병력 규모가 파악이 안돼. 이때 해병대 지휘관이 명령을 내려. "당장 저 라이트부터 깨버려! 발포해!"

"(헌병이) 길을 안 비켜주니까 발포 명령이 내려져가지고 대대장이 '사격 개시' 하니까 육군 차량 라이트만 쐈어요."
-조봉인, 당시 해병 1여단 소속 병장

그리고 해병대는 총을 쏘며 진격했어. 진압을 위해 출동한 헌병의 병력은, 50명 뿐이었어. 근데 해병대는 약 1,500명, 공수부대는 1,000명 정도야. 쿠데타 군은 합쳐서 약 2,500명인데, 헌병대는 고작 50명이야. 이게 상대가 돼? 헌병대는 대응 사격을 하다가 포기하고, 한강 북쪽 언덕으로 퇴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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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대로 그냥 서울 시내로 들어갔지. 쿠데타인 줄 모르고."
-조봉인, 당시 해병 1여단 소속 병장

한강인도교가 쿠데타군에 의해 뚫린 시각, 5월 16일 새벽 4시 15분. 사실 이날 출동한 헌병의 규모에 의문이 제기돼. 헌병대는 보통 경(輕)무장을 해. 가벼운 무장이야. 중무장의 반대야. 권총이나 소총 같은, 혼자서 다루는 개인화기로 무장하는 거야. 하지만, 이땐 4.19 1주년을 전후해서, 사회가 너무 뒤숭숭했어. 그래서 헌병들도, 수류탄, 최루탄, 기관총 등 상당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어. 당시 장도영 총장이 출동 명령을 내릴 때, 곁에 있던 방자명 중령도 이런 정보를 보고했어.

"각하, 남산에 1개 공병단이 주둔하고 있고, 각 헌병대는 중화기를 갖고 있습니다."

박격포나 기관총 같이 화력이 강한 무기를 '중화기'라고 해. 그런데 장도영 총장은 카빈, 즉 소총만 갖고 출동하라는 거야. 방자명 준령은 당시 이 결정이 의아했다고 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군의 작전은 완벽해야 한다. 쿠데타군이 진입하려는 판에 이렇게 엉성한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장도영은 전투를 잘하는 장군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방자명, '우리는 5.16 쿠데타 저지에 실패했다' 中

그리고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있어. 트럭으로 다리를 막되, 차 한 대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으라고 한 거야. 명분은, 민간차량과 미군차량을 통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막으려는 작전치고는, 좀 애매하지? 장도영 총장은 왜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장도영 총장은 훗날 당시 결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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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헌병 소대가 중장비 가지고 가서 전투하러 가는 게 없어요. 이건 군대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는 얘긴데 말이야. 그게 아니야. 교통 통제하라 이거야. 헌병이 교통 통제하는 거지, 전투하는 부대가 아닙니다. 이걸 전투하러 가라고 했다고 생각했다고요? 아니에요. 교통통제 모르겠어요? 트래픽 컨트롤. 보낼 차량은 보내고, 통과시킬 차량은 통과시키고 말이야. 트래픽 컨트롤. 해병대가 말이야. 그것도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이야, 한강 다리를 넘는다는 거거든. 근데 우리 육군본부에서 나간 헌병대가 어떻게 하느냐 말이에요."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

쿠데타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교통 통제를 지시했다는 거야. 그렇게 한강인도교를 넘은 박정희 소장은 공수부대를 이끌고 남산 KBS 방송국으로 향한 거야.

▲ 혁명 방송

새벽 5시 방송은, 국민에게 알리는 포고이자, 다른 군부대에 보내기로 한 작전 신호야. 근데 방송국에 엔지니어가 없어서 방송을 못할 위기야. 5시에 방송이 안 나가면, 작전에 차질이 생겨.

약속된 방송 시간 5분 전, 갑자기 방송국 현관이 소란스러워. 엔지니어들이 돌아온 거야. 엔지니어들은 총성을 듣고 명동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는데, 경찰들이 안 믿어줬대. 그런데, 방송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뭐야? 바로 '방송 펑크'야. 그래서 방송국으로 다시 돌아오다가, 자신들을 찾는 군인들을 만난 거야. 박종세 아나운서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박정희 소장에게 얘기했어.

"박 장군님이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 드리면 안 될까요?"

그런데 안 된대. 박종세 아나운서가 하래. 누구나 아는 친숙한 목소리로 방송을 해야, 국민들이 안심할 거래. 이젠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엔지니어가 메인 키를 올리고, 방송이 시작됐어. 5월 16일 새벽 5시. 전국에 혁명 방송이 울려 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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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쿠데타군은 방송국 외에 또 어디를 점령했을까? 바로, 육군본부. 이미 6군단 포병대대가 육군본부를 장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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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그러더라고. '자네가 포병이니까 6군단 포병 누구 아는 사람 있냐?' 해서 '친구들도 거기 대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니까 '좋다. 그 사람들을 맨 처음에 육군본부 광장으로 불러들여라' 그래서 포천에서 온 거지. 방해를 받을 데는 저 검문소인데 헌병 검문소밖에 없으니까. 헌병 검문소야 뭐 '기동 훈련 나간다' 그러면 오히려 안내해주지. 포병 기동 훈련을 자주 하니까. 105mm, 155mm, 8인치 3개 대대가 들어온 거야. 굉장하더라고. 8인치까지 들어오니까 말이야. 육군본부 광장이 꽉 차더라고. 운도 따랐어 그때.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김용채, 당시 육군 대위, 쿠데타 군 가담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무방비 상태의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포병대는 육군본부를, 공수부대는 남산의 방송국을, 해병대는 서울시청과 치안국, 중앙 전신국을 점령했어. 한강인도교에서 교전이 있기는 했지만, 너무 쉽게 성공한 거 같지 않아?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한가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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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새벽 5시 방송을 통해 나간 혁명공약이거든. 근데 '장도영' 이름이 있어. 쿠데타군의 혁명공약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거야. 이건 박정희 소장의 생각이었어. 자신의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으니, 장 총장을 1선에 올리자는 거야.

"육군참모총장이 찬동을 안 하면 군이 움직이지를 않아요. 움직여야 할 명분이 없잖아요. 최고사령관이 찬동을 안 하는 혁명이 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악착같이 그 양반을 앞장세운 거지."
-김용채, 당시 육군 대위, 쿠데타 군 가담

박정희 소장의 당시 보직은 2군 부사령관. 게다가 좌천된 상태였어. 당시 미군은 박정희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강하게 압력을 넣고 있었어. 그래서 박정희 소장은 5월말이면 군복을 벗을 위기였대. 시간이 별로 없었던 거야. 그런데 왜 미군은 박정희 소장을 안 좋게 봤을까? 미군은 박정희 소장을 공산주의자로 판단했었대. 박정희 소장의 군 경력이 좀 복잡해. 이 과정에서 묘하게 얽힌 인연이 있어.

박정희 소장은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만주군의 소위로 임관해. 그런데 얼마 후에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고, 귀국해서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해. 현 육군사관학교야. 군 사관학교만 세 군대를 간거야. 그런데, 소령으로 진급한 시점에 박정희는 엄청난 위기를 맞아. 남로당, 공산당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가 된 거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불명예제대를 했어. 민간인이 된 거지. 그러자 같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백선엽 당시 대령이 박정희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해. 일종의 행정직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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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6.25전쟁이 발발했어. 이때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직시켜준 인물이 있어. 바로, 장도영이었어. 이후에도 박정희 소장은 1960년 보안 심사에 걸려서 강제 예편 위기를 맞아. 이런 박정희를 2군 부사령관으로 받아들인 사람, 역시 장도영이야. 장도영은 박정희를 두 번 구한, 은인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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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장도영, 둘의 인연은 좀 묘해. 나이는 박정희가 장도영보다 6살이 많아. 박정희는 1917년생, 장도영은 1923년생이야. 그런데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9개월 먼저 소위로 임관했어. 장도영이 상관, 박정희가 부하로서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 온거지. 그리고 이 쿠데타가 육군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보이려면, 장도영의 이름이 필요했던 거야.

먼저 혁명공약을 동의도 없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발표해버렸어. 육군본부를 점령한 뒤에는, 계속해서 장도영 총장한테 계엄사령관 직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어. 진압군의 지휘관에게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한 거야.

▲ 사라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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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드는 한 가지 의문. 나라가 이 지경인데, 대통령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제로 바뀌었어. 당시 우리나라 최고 지도자는 장면 총리. 물론 상징적인 국가 원수로서의 대통령은 있어. 윤보선 대통령. 하지만 내각제에 따라 총리가 최고실권자야. 쿠데타군 입장에선 장면 총리는 하야시켜야 할 대상이지.

박정희 소장이 방송국을 점령하던 그 시각, 공수부대 중대장 여섯 명을 장면 총리를 체포하러 보냈어. 반도호텔 809호. 을지로에 있는 호텔인데, 장면 총리가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야. 체포조는 장면 총리의 숙소를 급습했어. 그런데 호텔은 텅 비어있었어. 장 총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반란군은 물론이고, 정권의 관계자들도 아무도 연락이 안 돼. 장도영 총장도 모르고, 미군도 몰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최고 실권자인 총리가 행방불명됐어.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이끈 반란군은 3,600명이었어. 그리고 한국군은 60만명이야. 장면 총리의 진압 명령이 있다면, 반란군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인원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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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반란군 진압이 가능했을 대표적인 한국군은 이한림 중장이 이끄는, 제1군 사령부야. 무려 20개의 전투사단을 보유하고 있어. 전군 최대 규모야. 그래서 이한림 사령관의 입장이 매우 중요해.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어. 하지만 병력을 출동시킬 수가 없어. 국가 최고 지도자의 명령이 필요하거든.

이한림 사령관은 부관을 시켜서 장면 총리에게 밀서를 전달하도록 시켰어. 출동 명령을 내려달라는 밀서. 부관은 장면 총리와 친했던 신문사 사장실에 도착했어. 그런데 그 신문사 사장도, 장면 총리가 어디 있는지 모른대. 장면 총리의 운전기사는 위치를 알 거라 생각한 신문사 사장은 운전기사를 찾아 불러들였어. 장면 총리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니까, 운전사의 입이 굉장히 무거워. 끝내 모른다고 버텨.

사실 장면 총리도 쿠데타에 대한 첩보를 여러 차례 들었어. 총리 재임기간동안 10여 차례나 그 정보를 입수했다고 해. 그 중에는 주동자가 '박정희'라는 구체적인 정보도 있었어. 당연히 장도영 총장을 불러서 확인했지. 그러자 장도영 총장은 그럴리 없다고, 염려 말고 안심하라 했어. 총리는 이런 참모총장이 불만스러웠어.

심지어 장면 총리는 5월 16일 일주일 전에도 쿠데타에 대한 첩보를 또 들었어. 이 때도 장도영 총장의 대답은 비슷했어. 아무 염려 말라며, 그럴리 없다고. 장면 총리도 믿을 구석이 있긴 했어.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키겠냐는. 그러다 결국, 5월 16일 새벽 쿠데타군이 한강인도교를 건널 때쯤 돼서야, 장도영 총장은 장면 총리에게 소식을 알렸어.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또 염려말라고 했어. 그러자 장도영 총장에게 불신이 쌓인 장면 총리는, 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직접 와서 자세히 보고를 하라 했어. 장면 총리는 호텔에서 장도영 총장을 기다렸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바로 그때, 멀리서 총성이 들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장면 총리는 먼저, 호텔 맞은편에 있던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갔어. 굳게 닫힌 철문을 두드렸는데, 미국 대사관에서 응답이 없어. 장 총리는 다시, 안국동의 미 대사관 직원 숙소로 향했어. 미국 CIA 서울 지부장의 집인데, 장면 총리와 친한 사이였거든. 하지만 그는 총성 보고를 받고 미 대사관으로 달려가고 있던 중이야. 두 사람의 길이 엇갈렸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데, 지켜주는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어. 장 총리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피난처는, 바로 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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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의 칼멜 수녀원. 장면 총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어. 안전한 곳에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부인과 함께 칼멜 수녀원에 갔어. 원장 수녀는 장면 총리를 수녀원 안채 깊숙한 방으로 안내했어. 장 총리는 이 곳에서 뭘 했을까? 당시 원장 수녀였던 클레어 여사가 24년 만에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한 기록이 있어.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분은 처음엔 불의의 사태가 곧 해소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라디오를 갖다 달라고 요청하기에 내가 라디오를 구해다 드렸죠. 수녀원 안에선 라디오를 못 듣도록 돼 있었지요. 뉴스를 듣고 침울한 표정이었습니다."
-클레어, 당시 원장수녀, 1985년 인터뷰 내용 中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서 주한 미 대사 대리였던 마샬그린과 통화를 했대. 하지만 그에게도 자신의 은신처는 밝히지 않았다고 해. 혹시나 도청이 될까봐 걱정됐던 거지. 여러 곳에서 전화가 와서 장면 총리를 찾았지만, 수녀원장은 총리가 없다고 끝까지 잡아뗐어. 장면 총리는 쿠데타군 진압 명령을 내리는 것도 계속 주저했어. 왜냐하면, 절대로 아군끼리 서로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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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 쿠데타군 양쪽 모두 백방으로 장면 총리의 행방을 찾고 있지만, 오리무중이야. 박정희와 장도영은 대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갔어. 윤보선 대통령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본인은 청와대에 남아있었어. 이때 윤보선 대통령은 유명한 말을 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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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구먼"

라디오 방송에서는 혁명방송에 이어 계엄령 방송이 나오고 있어. 박정희가 누구의 승인도 없이,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거야. 박정희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계엄령에 대한 사후 승인을 요구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은 계속 거부했어. 이때 미군 사령관이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와. 당시 5만 6천 명의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고, 당시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었어. 그래서 미군의 입장이 중요한데, 미군은 "우리는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한다. 군사 쿠데타는 무효다"라는 입장이야. 하지만 한국 내부의 문제이니, 미군이 아닌 한국군을 출동시켜서 쿠데타를 막으라고 윤보선 대통령에게 요청해.

한국군 1군의 6군단장, 8사단장은 쿠데타 진압을 위한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는 상태야. 윤보선 대통령은 전방부대에 비서를 급파해서 진압 병력의 출동을 저지시켰어. 그도 역시, 한국군 간에 유혈 사태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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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면 총리와 장관들을 찾아 나서. 그런데 장면 총리와 연락이 안되는 상황이잖아? 어떻게 찾았을까? 아예 방송으로 찾았어.

"장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 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모든 국무위원들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

장면 총리가 이 방송을 들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장면 총리는 대통령이 쿠데타 진압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돼. 결국에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게 됐다고 해. 총리와 대통령이 소통이 잘 안되는 거 같지?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당시 시대적 배경을 들여다 봐야해.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며 4.19혁명이 일어났어.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파벌 다툼이 극심했어.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장면 총리는 신파. 장관 자리를 두고 구파가 하느냐 신파가 하느냐, 첨예하게 대립했어.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은 10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했어. 장관들의 평균 임기가 두 달. 국민들은 지난 정권동안 억눌려왔던 요구들을 쏟아내면서, 연일 데모를 해. 오죽했으면, 이런 말까지 나왔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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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

경찰관도 데모하고, 초등학생들도 데모를 했어. 심지어 데모를 그만하자는 데모까지 했어.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어수선했어.

여기에 군 장교들의 불만도 심각했어. 인사 적체가 너무 심했어. 국군 창설 초기엔 장교들의 훈련 기간이 굉장히 짧았어. 육사 1기는 6주만 훈련을 받았어. 2기는 3개월, 5기는 6개월, 10기는 1년의 훈련을 받았어. 11기부터 4년의 정규 훈련을 받았어. 그래서 육사 1, 2기들은 대부분 일찍 장군이 됐어. 나이도 어렸어. 20대 장군, 30대 사령관도 나왔어. 장도영 총장도, 총장 임명 당시의 나이가 38세였어. 육사 1기와 8기의 평균 연령 차이가 두세 살 밖에 안나. 근데 계급은 대장과 중령 차이야. 특히 승진이 딱 막힌 8기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어. 쿠데타의 주체 세력이 육사 8기가 된 이유이기도 해.

게다가 많은 장교들은 월급이 적어서, 군수품을 내다 팔기도 했대. 나름 자부심 높은 엘리트들인데,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너무 컸던거야. 반란의 뜻이 점점 모였고, 그 중심에 박정희 소장이 있었어.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당시 꽤 많았다고 해. 나라를 지키라고 쥐어준 총칼을 정권을 향해 들이민 거야. 또 쿠데타를 막아야 할, 참모총장, 대통령, 총리는 누구 하나 진압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어.

▲ 사진 속 숨은 의미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쿠데타 발발 3일째. 5월 18일이 됐어. 이건 5.16 군사정변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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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박정희, 그 옆은 차지철 대위. 사진 속 리더로 보이는 사람은, 박정희 소장 같지? 근데 사진 왼쪽 끝을 보면, 지프차의 일부가 보여. 그 왼쪽편의 상황을 찍은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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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차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장도영 총장이야. 이 지프차는 연단 대신 사용됐어. 그럼 지프차 위에 올라간 사람이 중심이겠지. 그가 바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쿠데타군 진압을 명령했던 참모총장이, 쿠데타군과 함께 주인공처럼 서 있어.

박정희 소장은 전략상 장도영 총장을 내세우고 계엄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고 했잖아? 5월 16일 오후, 장도영 총장은 결국 그 제안을 수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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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박사 내각하고 제2공화국하고 쿠데타가 들어왔어요. 중간에 서서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 이쪽에서 저쪽 치면 막아야 하고, 이쪽에서도 반대로 막아야 하는 것이 피 흘리지 않고 하는 방법 아니겠어요. 어떻게 피를 안 흘리고서 하는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누가 양다리 걸었다고 하건 간에 말이야. 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수습하는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 이게 내가 항상 얘기하는 겁니다."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

그렇게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한 손에 쥐게 됐어. 그리고 이 사진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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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 쿠데타군이 아닌, 육사 생도들이야. 16일 아침, 육본을 점령한 뒤야. 김종필은 육군 정보참모부 대위에게 빳빳한 천원짜리 한 다발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

"육사에 가서 교수부에 있는 동기생들하고 식사하면서, 혁명의 당위성을 잘 설명하고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을 성사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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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등장하는 한 사람. 육사 11기, 전두환 대위야. 전두환과 11기 대위 다섯 명은 육사에 가서 가두행진을 설득하기로 해. 그런데 육사 교장 강영훈 장군의 입장은 반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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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훈 교장은 쿠데타에 생도들이 동원되는 걸 막기 위해 육본을 찾아가서 사관생도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아달라 말했어. 그렇게 박정희를 만나고 나오는데, 무장한 공수단 대위들이 앞을 막아. 강영훈 교장은 육본 소회의실에 연금됐어. 결국 육사생도 800명과 졸업생 장교 200명은 제복을 갖춰 입고 거리로 나가 쿠데타 지지 가두행진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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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점에 장도영 총장은 장면 총리의 거처를 알게 됐어. 장도영은 혜화동 수녀원으로 찾아갔어. 잠적 55시간 만에 나타난 장면 총리는 내각총사퇴를 발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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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은 11개월 만에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어.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성공의 길에 들어섰어.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란 이름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꿨어. 박정희는 스스로 부의장 자리에 앉고, 장도영을 간판으로 내세웠어.

▲ 독재의 시작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야. 장도영 총장의 사진 하나를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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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로 연행되어 가는 장도영. 뒤에서 연행하고 있는 사람이, 당시 대위였던 노태우야.

"장도영 중장 등 반혁명 음모 사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혁명의 의의와 국문의 앞날을 망각하고 파벌 구성과 권력욕에 급급했던 장도영 중장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 세력 일당 44명을 지난 3일 체포 구금하고 엄중한 문초를 계속하고 있으며 장 중장은 자택에 연금되어 있다."
-당시 기사 내용 中

혁명공약 6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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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나라가 안정되면 정권을 넘기고 군인의 자리로 복귀하겠다는 의미야. 하지만 박정희 소장은 생각이 달라진 듯해.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지. 정권을 넘길 움직임이 안 보여. 빠른 시일 내에 정권 이양을 주장하는 장도영과 의견이 부딪혔어. 결국 김종필은 장도영을 체포하기로 결심했어.

1961년 7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은 일명 반혁명 사건 혐의로 체포돼. 그리고 쿠데타 초반 뜻을 합치고 병력을 지원해줬던, 해병대 김동하 소장도 체포됐어. 김동하 소장도 혁명공약에 따른, 원대 복귀를 주장했거든. 그렇게 군정은 연장됐고, 정권 이양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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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중장 진급 3개월 만에 대장으로 진급한 뒤, 스스로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어. 상대는 윤보선. 선거결과, 15만 6천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됐어. 그렇게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16년, 군부 시절 포함 18년간 장기 집권했어.

5.16 군사정변. 이렇게 표현하곤 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라고. 미국 CIA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이유에 대해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어.

"쿠데타에 대해 어떤 저항도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무관심 했다. 장면 총리는 저항을 포기했고, 장도영은 이중행동을 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타협적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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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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