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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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독립투사 피 뽑아 고문한 친일경찰 하판락, 해방 후 처벌받지 않은 이유는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3.03 11:54 수정 2023.03.03 12:09 조회 3,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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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일 방송된 '58년만의 복수- 착혈귀를 찾아라'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광규, 장희진, 가수 적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의 두번째 생일

때는 1971년 8월 부산. 커다란 카스텔라 케이크 앞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아버지의 생신 축하 노래를 불렀어.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케이크의 촛불을 껐어. 근데 막내 아들 상국이가 좀 갸우뚱해. 아버지 생신은 3월인데, 왜 또 생일파티를 하지? 의아해 하는 상국이에게 누군가 말했어. "상국아, 아버지는 생일이 두 개란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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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8월 15일 광복절이 되면 큰 카스텔라를 사오니까 즐겁게 먹었죠. 거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걸 그 전에는 몰랐죠.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오면서 '자신이 옛날에 일제 시대 때 일제 형무소에 있었다' '일제한테 이런 고문을 받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번씩 하셨죠."
- 이상국, 막내아들

상국이는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어. 나이를 계산해보니 아버지 나이 불과 10대일 때인데, 나라를 위해 엄청난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거든. 아버지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허허허 웃고 넘기셨어. 그리고 그 후에도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카스텔라를 사오셨어.

18년이 지나 1989년 어느날, 아버지가 상국이를 불러 뭔가를 결심한 듯 이야기를 꺼냈어. 아버지는 "상국아, 죽기 전에 내가 한 일을 남기고 싶구나"라면서 이걸 보여주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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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안내글이었어. 상국이는 이 날, 광복절이 왜 아버지의 두번째 생일이 됐는지 상세히 듣게 돼. 지금부터 아버지의 그날 이야기를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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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이의 아버지, 이광우. 1942년 부산에서 당시 나이 17세 소년 광우는 어느날 친구들과 집에서 모여 밀담을 나눠. "우리도 가만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일본은 이제 망한다니까", "일본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주자"라며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아. 광우는 친구 5명과 함께 일본에 대항할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었어. 목표는 '조선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본인 회사를 파괴하자' 였어. 광우와 친구들이 가장 먼저 한 건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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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

광우와 친구들은 이 전단을 몰래 뿌렸어. 사람들이 볼만한 곳이면 여기저기에. 심지어 일본으로 출항하는 배에도 꽂아 뒀어. 이런 전단을 읽기만 해도 큰일나는데, 직접 유포한다?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런데 당시 광우의 마음은 항일의지로 불타고 있었어. 그 이유는, '노다이 사건'이라 불리는 '부산항일학생의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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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에서 학생들이 참가하는 국방대회가 열렸는데, 일본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편파 판정을 하는 거야. 이를 참지 못한 천여명의 조선 학생들이 대회 심판장의 관사를 습격해. 그 심판장의 이름이 노다이야. 이 사건을 접한 광우는 깨달았어. 일제의 차별과 억압에 대항하는 건 나이와 상관 없다는 걸. 그래서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거야.

그렇게 시작한 항일운동. 무서움에 온 몸이 떨리긴 했지만, 이 전단을 뿌리고 친구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뭔지 모를 희열에 웃음이 새어 나왔어. 함께 두려움을 이겨낸 광우와 친구들은 그렇게 항일 전단을 뿌리고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누군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광우의 팔목에 수갑을 채웠어. 경찰이였어.

▲ 악몽 같은 기억, 악마 같은 하판락

광우가 끌려간 곳은 경남 경찰부 고등경찰과 외사계. 경찰은 항일 전단을 살포하도록 누가 시켰냐며 추궁했어. 대답을 하지 않자 주먹과 발길질이 나와. 경찰은 광우에게 "이미동이 시켰다"고 말하면 풀어주겠다고 회유도 했어. 이 항일 전단 살포를 다른 일과 엮어 큰 사건으로 만들려는 거야. 그럼 본인의 실적이 더 커지니까. 광우는 모른다며 끝까지 사실만 얘기했어. 그러자 광우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이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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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고문은 로프줄로 팼어. 와이어 줄로. 야구방망이를 발 밑에 끼워 넣어서 올라타고. 말을 안 들으니까 일주일 후에는 물을 먹이고 고문했어. 물고문. 입으로 토해내고 코에 들어간 물이. 주전자로 부으니까. 이렇게 먹이고 입으로 토하니, 온 옷이 물이야."
-이광우 선생님의 2000년도 인터뷰 中

때리는 건 기본이고 물고문까지 당해. 방망이를 무릎 뒤에 끼우고 꿇어 앉혀. 그리고 허벅지에 경찰들이 올라 타는 거야. 이렇게 하면 근육이 파열되고 무릎이 탈골 돼. 그 이상의 잔인한 고문은 계속 이어졌어.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렇게 고문을 당하던 어느날, 광우는 경찰의 다리를 붙잡았어. 그리고 입을 "아버지 아버지"라 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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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고문하는 사람 보고 '아버지'라고 외치는 건, 이게 무슨 이야기지? 싶었어요. '왜 그랬어요?' 라고 여쭤보니,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만 좀 때려라', '그만 고문해라', '당신도 집에 가면 나 같은 아들이 있지 않느냐' '당신 집에 있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좀 그만 때려라' 그런 마음이었대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같은 조선인끼리 왜 그러냐고'."
-이상국, 막내 아들

광우를 고문하던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었어. 친일 경찰. 광우는 자신을 고문한 친일 경찰의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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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기억나는 이름이 '하판락'. 매일 '하판락'이 전담하고, 고문실에 들어가면 '하판락'이 앉아 있고..."

하판락. 광우의 머리 속에 각인된 이름이야. 당시 30대 남자인데 기골이 장대했대. 이런 하판락에 대한 기록은 또 있어.

"나는 부산의 경남도 경찰국의 감방 안에 다시 수감되었다. 담당 형사는 하판락이라는 조선인이었으며 거의 매일 같이 이들에게 불려 나가 취조를 받았다. 욕지거리들이 희미한 의식 속에 들려왔다. 개XX니 조센징이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상하게 느낀 것은 나를 취조하고 고문하는 형사들이 모두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본인보다 더 지독하게 고문을 하였던 것 같다."

-김준기의 자서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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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친일 경찰이 하판락 뿐이었을까? 기록을 보면, 왼쪽부터 고문경찰 1세대 '고문왕' 김태석, '고문의 황제' 김덕기, 그리고 모진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를 세 분이나 순국케 한 노덕술이야. 동족이 동족을 해하는 엄청난 비극이 곳곳에서 일어났어. 이들의 악랄함을 오히려 일본 경찰이 배우려 했대.

그런데 광우가 당한 고통은 아직 시작에 불과해. 평생 잊지 못할 너무도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어.

▲ 끔찍했던 착혈 고문, 광복을 맞았지만…

분위기가 유독 음산했던 어느날, 광우는 또 고문실로 끌려갔어. 그리고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강제로 무릎 꿇려져. 고개를 든 광우는 뭔가를 보고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그날'에 대해 광우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해. 도대체 어떤 고문이었길래, 그걸 지켜보는 게 끔찍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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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주사기를 이용한 고문이야. 주사기로 고문 당하는 사람의 팔을 여기저기 찔러. 그러다보면 혈관이 잡히겠지. 그럼 피스톤을 당겨. 그럼 주사기에 피가 가득 차지. 그리고 나서 주사기를 고문 당하는 사람의 얼굴을 향하게 하고는 피스톤을 눌러. 이걸 반복하는 거야. 얼굴, 몸, 벽, 모두 자신의 피로 물들어. 그 좁은 공간이 피비린내로 가득 찰 때까지. 훗날 이 고문에는 '착혈 고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당시 광우는 고작 17살이었잖아. 그런 고문을 지켜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던 광우는 가장 큰 바람이 그냥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거였대. 이렇게 광우가 고문 당한 기간은 무려 10개월이었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어. 그 후 재판을 받았고, 단기 1년, 장기 3년형에 처해져.

감옥에 갇힌 채 시간은 흘러. 그러던 어느날, 형무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갇혀있던 수감자들이 한사람 한사람 사라져. 바로 그때, 광우의 방에도 간수가 찾아와. "너는 천황폐하의 은덕으로 가석방됐으니 다시 소환 시에는 형무소로 즉시 와야 한다"며 광우를 형무소 밖으로 내보내. 광우가 갑자기 왜 석방됐을까?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독립의 날이 온 거야. 광복을 맞으며 광우는 집으로 돌아왔어. 무려 2년 5개월 만에. 이때 광우는 다시 태어난 거지. 그렇게 광복절은 광우의 두번째 생일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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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문과 옥살이에 몸은 만신창이가 됐어. 밥도 잘 못 먹고 혼자선 걷지도 못해.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리는데 1년이란 시간이 걸렸대. 세월이 지나서 성인이 된 광우는, 맞선 자리에서 만난 상대가 "형무소에 왜 다녀온 거냐"라고 묻자, 항일 운동을 했다고 대답하는 대신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을 말했어. 자신이 한 일을 숨기고 싶었던 거야. 왜 그랬을까?

광우가 옥살이를 마치고 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 동네에 소문이 났고 마을 사람들이 광우를 보러 찾아왔어. 근데 돌아온 직후는, 광우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때라 몸이 불편해 화장실도 기어서 가야 했어. 그 모습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나대니까 저 꼬라지 됐다"며 수근거렸어. 광우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 그 사람들에게 당한 수모 때문에, 광우는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 한 거야.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건 아냐. 하지만 광우는 그 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입을 다물었어.

광우가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친일파들은 어떻게 됐을까? 풍족한 재산으로 계속 잘 살았다는 이야기, 들은 적 있지? 해방 후 친일파들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이야기해 줄게.

▲ 친일파 청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

때는 광복 4년 후인 1949년. 누군가의 집으로 남자들이 들이닥쳤어.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입이 떡 벌어져. 해방된 지 4년이 지났는데, 벽면에 일왕 사진이 떡 하니 걸려있고, 한쪽에는 일제 훈장 30개가 진열돼 있어. 그리고 그 응접실 가운데 앉아있는 한 남자, 대한 제국 황실의 종친 이기용이야. 일제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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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이기용을 체포한 사람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줄여서 반민특위 사람들이야.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설치된 특별 기구야. 법으로서 친일파를 처벌하겠다는 거지. 이 반민특위에는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특별경찰대까지 있어. 경찰권, 검찰권,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거야. 한마디로 원스톱 시스템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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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친일파 잡는 반민특위를 반겼어. 전국에서 반민특위에 친일파를 고발하는 투서가 쏟아졌어.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어.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반역자 숙청의 반민법이 공포된 지 3개월이 지난 오늘, 드디어 추상 같은 반역자 처단의 막이 열리었다. 조국과 동족을 좀먹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불타는 원한과 울분을, 이제 태극기가 날리는 하늘 아래 우리 소리쳐 푸는 날이 돌아왔다."
-당시 서울신문 기사 中

이제 국민들의 관심은 한 곳으로 쏠려. 누가 이 반민특위의 위원장이 될 것인가. 친일파 청산이라는 이 중요한 일을 앞장 서서 해낼 사람이 궁금한 거야.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이 분이 선출됐어. 김상덕 위원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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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아버지가 거의 몰표를 받고 위원장으로 당선이 된 거죠. 왜냐하면 아버지는 중경 임시정부 시절에 문화부장으로 계셨습니다. 1918년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오로지 그 길로만 갔거든요."
-김정륙,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상덕 위원장은 3.1운동의 불씨가 된 2.8 독립선언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야.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광복 후 김구 선생님과 함께 귀국했어.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신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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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일파를 잡아야 하는데, 친일파의 기준이 뭘까? 반민법에 친일파를 아예 규정해놨어. 간단히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은 자', 그리고 '일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가담한 자',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힌 자'. 이런 규정에 따라 친일파 1호로 검거된 사람은 박흥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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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이라고 알아? '야인시대' 드라마에도 나오던 화신백화점. 이 화신백화점이 박흥식의 소유였어. 당시 대표적인 부자야. 박흥식은 일제에 어마어마한 돈을 기부하고, 태평양 전쟁 때는 심지어 비행기 공장까지 만들어 침략 전쟁에 협조한 사람이야. 검거된 박흥식, 뭐라고 했을까? "나는 친일을 한 적이 없다. 난 단지 사업가일 뿐이다"라고 부인했어.

그리고 체포된 또 다른 친일파. '무정'을 쓴 소설가 이광수.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였어. 100편이 넘는 친일 문학작품을 쓰고, 전국을 돌며 우리나라 젊은이들한테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가라"고 부추겼어. 친일파로 몰린 그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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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 헌금을 내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않고 살아있는 것도 협력이다."
-이광수의 '나의 고백' 중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친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했어. 반민특위는 이렇게 사업가, 문인, 정치인 등 수많은 친일파를 검거했어. 그런 친일경찰 하판락은 검거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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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광우에게 온 '증인소환장'이야. 보낸 곳은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피고인은 하판락이야. 하판락이 검거되며 광우를 증인으로 부른 거야. 친일 행각에 대한 증언을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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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24일 오후 2시. 두 사람은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다시 만났어. 하판락은 피고인석에, 이광우는 증인석에 섰어. 원수를 만난 광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판장이 하판락에게 "이광우를 아느냐"고 물었어. 그러자 하판락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며 자신은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어. 이 말을 들은 광우는 증인석을 박차고 뛰쳐나가 그대로 하판락에게 주먹을 날렸어. 그리고 울분을 담아 본인의 항일투쟁, 하판락의 친일 행각과 고문방법에 대해 거침없이 증언했어. 증언을 다 들은 재판장은 광우에게 "자네, 일제치하에서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했네"라며 치하했어. 광우는 드디어 하판락이 죗값을 받겠구나 생각했어.

이렇게 반민특위가 다룬 사건은 700건 정도야. 과연 반민특위가 다룬 이 사건들은 처음 취지대로 잘 진행됐을까?

▲ 친일파의 반격, 반민특위의 해산

사실 친일파 청산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어. 친일세력이 가만 있었을 리가 없잖아. 풍부한 재력과 높은 지위를 이용해 온갖 수단을 다 썼어. 친일파의 방해공작이 시작됐어.

"민족을 분열하는 반민족 안을 철퇴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앞잡이)다" 라고 적힌 삐라들이 퍼졌어. 친일파 청산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거야. 이들의 논리는, 친일파 청산을 하면 민족이 분열되고, 민족을 분열하게 만든 놈들은 공산주의자다. 고로, 친일파 청산을 하려는 자들을 공산주의자라는 거야. 친일파 청산에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운 거지. 이게 먹힐까?

광복 후에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한반도야. 그러다 보니 이런 프레임이 먹혔어. 청산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심지어 국회에서도 "국민 화합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반민자 처벌은 시기상조다", "이건 통일 후로 미룹시다"라는 의견들이 나와.

친일파의 방해는 이제 시작이야. 심지어 암살까지 계획했어. 한 친일 경찰이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서, 김상덕 위원장과 반민특위 위원들을 해치려 했어. 이 친일 경찰, 누구일까? 고문으로 독립운동가 세 분을 죽인 경찰, 노덕술이야. 이 계획에 돈을 댄 사람은? 화신백화점 박흥식이고. 그런데 이 계획은 실행이 되지 못했어. 살인청부업자가 자수한 거야. "내가 비록 살인청부업자지만 친일파의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반민특위 위원들은 해야할 일을 계속 했고,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위협을 멈추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 이건 당시 국무 회의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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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피검에 관하여는 그가 치안기술자임을 비추어 정부가 보증하여서라도 보석하도록 함이 요망"

친일경찰 노덕술을 보석으로 풀어주자는 내용이야. 치안기술자라는 이유로. 다른 것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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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무분별한 난동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터임으로, 헌법 범위 내에서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신다는 유시에 대하여, 불법 조사관 2명, 그 지휘자를 체포하여 의법처리하여 계속 감시하라 지령하시다"

반민특위의 난동으로 치안에 문제가 생겼으니, 노덕술을 검거한 반민특위 조사관을 체포하라는 지령이 내려진 거야. 이런 지령은 내린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야. 대통령이 나서서 반민특위 활동을 억압하는 상황이야.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청산보다 치안과 반공이 더 중요하다고 봤어. 이런 와중에,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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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49년 5월. 김상덕 위원장의 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와. 그 전화를 받은 김상덕 위원장은 아들 정륙이를 불러 "따로 부를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어. 정륙이가 방에 들어오고 얼마 후, 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 경호팀들이 집을 안팎으로 둘러싸고, 한 남자가 집안으로 걸어들어와. 이승만 대통령이야.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과 이승만 대통령의 독대가 이뤄진 거야.

"이제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경찰 노덕술 풀어줘라', '친일경찰들 건드리지 말자'. 반민특위가 활동기간이 정해져 있었어요. '그때까지 슬슬 끌고 가다가 마치는 대로 장관 하나 줄게. 교육부 장관 할 거냐, 아니면 다른 거 하고 싶냐'. 장관 보따리 하나 들고 온 거예요."
-김정륙, 김상덕 위원장 아들

장관 자리를 줄 테니 친일 경찰들을 풀어주라는 이승만 대통령. 이 이야기에 김상덕 위원장은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를 감싸 달라는 얘기냐. 임시정부 대통령까지 한 분이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며 불같이 화를 내고는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했어. 그렇게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돌아갔어.

그리며 며칠 뒤 6월 6일 아침. 서울 중구의 반민특위 본부 사무실에 갑자기 수십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와. 경찰이야. 쳐들어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류를 탈취해 불살라버려. 전국에서 모인 친일파 투서들을 없앤 거야. 그 외에 온갖 자료며 서류는 다 보자기에 싸서 챙겨 가버렸어. 반민특위 본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어. 직원들은 코너에 몰려 두들겨 맞았고, 30여명의 반민특위 직원들이 체포됐어.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한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어. 명분은 '반민특위가 국립경찰에 해를 끼치고 있고, 이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것. 결국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한 반민특위 위원들은 총사퇴를 해.

"반민특위가 해산됐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는데, 전 해산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파괴 당한 거예요. 무력으로 헌법기관을 파괴했다고 보는 거예요."
-김정륙, 김상덕 위원장 아들

결과적으로 반민특위 활동의 가장 큰 장벽은,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거야.

그럼 반민특위가 조사 중이던 사건 약 700건의 친일 사건은 어떻게 됐을까. 그 중에 처벌 받은 친일파 수는 0명. 단 한 명도 없었어. 그 어떤 심판도 이루어 지지 않은 거야. 이렇게 면죄부를 받은 친일파들 대부분은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게 돼. 당시 풀려난 친일파 중에는 하판락도 있었어. 그 소식을 들은 광우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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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참 원통하고 이럴 수가 있느냐. 국회에서 통과시켜 법안 만들어놓고. 반민특위가 체포한 사람들을 풀어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럴 수가 있느냐. 아주 원통하게 생각했죠."
-이광우 선생님의 생전 인터뷰 中

▲ 50여년 만에 발견한 하판락의 흔적

반민특위가 해산되고 40년이 지난 1989년. 이광우 씨의 아들 상국 씨가 이 모든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게 돼. 아버지는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던 증인소환장과 죄수번호 패찰도 아들에게 보여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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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참 한이 많았구나.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있죠. 그 때 제가 느낀 게, 아버지의 진심이 무엇일까? 아버지가 살아온 생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버지가 이걸(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하고 싶다, 내가 한 일을 알리고 싶다, 라고 했을 때는 1989년도가 어찌 보면 큰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국, 이광우의 막내 아들

아들로서 이건 꼭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상국 씨는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어. 하지만…

"귀하의 경우에도 항일운동에 참가하신 사실은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되오나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거증자료가 부족하거나 포상 기준상 포상 범위에 포함되지 못하였기에, 이번에 포상을 드리지 못하게 된 것이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소환장과 패찰은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어. 증인소환장에는 항일 운동을 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패찰도 그냥 숫자일 뿐이고 이름이 없다는 거야. 하지만 아들 상국 씨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어. 끝까지 가보자고. 그렇게 아버지의 행적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해. 아버지가 고문 당한 유치장, 복역했던 교도소, 법원, 정부기록보존소, 경찰청, 검찰청 등 주말이고 휴일이고 아버지의 이름이 있을만한 곳은 어디라도 갔어. 하지만 각 기관에서 받은 답변들은 부정적이었어.

"귀하의 부친에 대한 행형 기록은 6.25 전란으로 인하여 모든 서류가 불타 우리소에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천소년교도소

"현재 우리청에 보존중인 판결문 중에도 귀하께서 요청한 판결문을 발견할 수 없어 발급해 드릴 수 없음을 회신하오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부산지방검찰청

아버지의 판결문도, 형무소 복역 기록도,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심지어 아버지도 이쯤에서 그만 포기하자고 하셔. 하지만 상국 씨는 포기하지 않았어. 아니, 포기할 수 없었어.

"이럴 수가 있냐, 오히려 내가 흥분해 가지고.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고. 그 다음에 대학교수님들 찾아다녔죠. 연구자들을 찾아가니까 '그 당시에 나왔던 책이 여러 권 있었다, 그 책을 한 번 찾아봐라' 그러면서 차근차근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공부를."
-이상국, 이광우의 막내 아들

아들 상국 씨가 아버지의 항일 기록을 찾아다닌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어. 그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해. 바로 인터넷에서.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화 되며 수많은 정보들이 검색되기 시작해. 아버지 이름 '이광우'를 검색해 본 상국 씨. 아무것도 안 나와. 이번엔 '하판락'을 검색해 봤어. 그랬더니 기사가 하나 검색돼. 바로 이 기사야.

꼬꼬무

어버이날 포상대상자 명단. 포상대상자의 이름만 쭉 적힌 기사야. 그 이름들 사이에서 하판락을 발견했어. 나이와 사는 주소까지 나와. 보는 순간 느낌이 딱 왔어. 이름이 특이해 동명이인일 확률이 거의 없고, 나이도 비슷해. 물어 물어 확인해 봤더니, 그 하판락이 맞아.

꼬꼬무

"이걸 보는 순간에 혼자서 환호를 질렀어요. 어떻게 이게 검색이 되냐는 거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 나오던 게. 이게 나한테는 하나의 빛이었죠. '이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죠."
-이상국, 이광우의 막내 아들

상국 씨는 하판락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어. 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직접 받아내자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버지한테도 하판락을 찾아갈 거라 말씀드렸지. 그러자 아버지는 "만나면 지기삐라(죽여버려라). 그거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 껍데기를 둘러쓴 짐승이다"라며 분노를 표출했어. 상국 씨는 당시 아버지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대. 속에서 막 끓어 올라와서 한이 맺혀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 10년의 노력으로 받은 인정

드디어 그날이 왔어. 상국 씨는 하판락의 집으로 찾아갔어. 문이 열리고 풍채가 좋은 노신사가 나와. 하판락이야. "우리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래. 드디어 아버지한테 말로만 듣던, 친일경찰 하판락과 마주 앉았어. 상국 씨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어. 지금 중요한 건, 하판락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듣는 거야. 상국 씨는 당연히 하판락이 쉽게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 순간 머리 속에 번뜩 수가 하나 떠올랐어. 상국 씨는 이름 하나를 언급했어. "당신 부하 중에 김소복이라고 있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러자 하판락의 눈빛이 그 때 흔들렸어.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냐 묻기에, 상국 씨는 아버지한테 들었다고 했어.

"(하판락이) 너의 아버지가 김소복이란 이름을 말하더냐, 김소복은 나의 심복인데, 김소복을 알 수가 없다. 정말 김소복이라고 이야기하더냐. 내 심복의 이름을 너의 아버지가 기억한다는 것은 맞다, 내가 잡은 것 맞다… 그 때 난 '이제 모든 게 끝나는구나' 그 순간에 친일 경찰의 입에서 우리 아버지 이름이 나와버렸잖아요. 더 이상의 어떤 증거가 필요해요."
-이상국, 이광우의 막내 아들

하판락이 실수를 한 거야. 오래 전 심복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서 아버지를 체포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어. 이렇게 해서 친일 경찰의 증언을 얻은 거야. 50년이 걸려 얻어낸 한마디였어.

상국 씨는 10년간 찾은 자료와 하판락과의 만남까지 모두 정리했어. 그게 바로 이거야.

꼬꼬무

독립유공자 공적서. 직접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공적서야. 아버지의 모든 것을 모은 10년간의 기록을 책으로 엮었어. 그리고 이 공적서를 보훈처에 제출했어. 이번엔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을까?

꼬꼬무

건국훈장이야. 드디어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은 거야. 10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거지.

꼬꼬무

이광우 애국지사는 생일이 하나 더 생겼어. 태어난 날이 첫번째 생일, 1945년 8월 15일이 두번째 생일, 그리고 이 훈장을 받은 2000년 8월 15일이 세번째 생일이 됐어.

꼬꼬무

이광우 애국지사는 2007년도에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딱 한마디를 남기셨어. "고맙다"라고.

사실 이광우 애국지사는 건국훈장 말고 증서가 하나 또 있어. 참전용사증서야.

꼬꼬무

그 불편한 다리로 6.25 전쟁에도 참전하셨어. 35년간의 일제 강점기, 1945년 8월 15일 광복, 1950년 6.25 전쟁까지. 이광우 애국지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그 시간을, 가장 정면으로 뚫고 나가신 분이야.

사실 이광우 애국지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애국자들이 굴곡진 인생을 살았어.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과 아들 김정륙 씨의 인생도 엄청난 변화의 연속이었어.

꼬꼬무

"아버지는 그 뒤에(반민특위 해산 후) 납북당했어요. 집으로 검정 지프차가 한 대 오더라고요.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막 나가려고 하는데 딱 들이 닥쳐가지고 '잠시 물어볼게 있으니 이 차에 타십시오' 그래요.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김정륙, 김상덕 위원장 아들

그 후 이 어린 아들의 삶은 또 어땠을까.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취직이 안 되고, 여행도 안되는 삶을 살았어. 이게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친일 청산을 위해 애쓴 아버지와 그 아들의 삶이야.

그럼 반대로, 친일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판락은 성공한 사업가로 91세까지 천수를 누렸어. 그리고 이광우 애국지사를 체포한 건 인정했지만, 고문한 사실은 끝까지 부인했어.

꼬꼬무

"김소복이라는 사람이 이 사람(이광우)을 조사했어요. 17살을 내가 조사할 위치도 안 되고요. 시간도 없고. 고문은 무슨 고문. 그거 뭐 고문할 거나 있나. 사실 우리도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기 붙어서 심부름해서 먹고 살았는데. 그걸 갖다가 친일파로 볼 수도 없고 나라를 팔아먹은 그 사람들이 친일파지. 먹고 살기 위해 그저 세력에 아부했다 하는 그 정도죠 뭐."
-하판락, 2001년 인터뷰 中

이제 와서 친일파를 단죄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뭘까? 힘들고 아프더라도 우린 이걸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해.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되기 때문에.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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