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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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내 손에 죽은 김득구, 심장에 칼 맞은 기분"…맨시니, 40년이 지나도 여전한 죄책감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1.20 12:23 수정 2023.01.20 12:26 조회 1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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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9일 방송된 '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1982 최후의 도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박명훈, 가수 박혜원(HYNN), 그룹 위아이 멤버 김요한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70년대 최고 인기 스포츠 복싱, 체육관을 찾아온 소년

때는 1976년 가을, 서울 노량진의 어떤 골목. 한 낡은 건물로 18살 상봉이가 들어섰어. 땀냄새가 가득한 그 곳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모여 주먹다짐을 하고 있어. 상봉이를 발견한 남자들이 90도로 인사하고 지나갈 수 있게 길을 터 줘. 상봉이가 여기 실세거든. 이 곳은 당대 최고의 복싱 명문, 동아체육관이야. 상봉이는 1977년 복싱 신인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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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체육관은 당시 챔피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체육관이야. 복싱을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동아체육관으로 가야만 했어. 출석부에 등록된 관원 수가 무려 1400명. 체육관 안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연습공간이 부족하고, 샌드백을 한 번 치려면 줄을 서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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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뻗을 데가 없었어요. 거의 3분의 2는 한달을 못 채우고 관 두는데, 관원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하니까. 그 당시에 복싱이 인기가 있었잖아요."
-이상봉, 전 복싱선수

복싱하면 생각나는 유행어가 있지? 4전 5기 신화 홍수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 선수는 1974년에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 벨트를 따냈어. 이땐 프로 야구, 축구도 없던 시절이라 최고 인기 스포츠가 복싱이었어. 그 시절 홍수환하면, 지금의 아이돌 인기 저리 가라 였어. 챔피언이 되고 귀국한 후 카퍼레이드, 대통령 축전, 청와대 오찬, 그리고 상금까지. 집 한 채는 기본이야. 챔피언이 되어 얻는 부와 명예로 인생이 180도 바뀌어.

특히 복싱은 돈 없고 빽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게 매력이었어. 링 위에서는 가진 게 없고 배운 게 없어도 모두가 평등해. 그래서 거리 곳곳엔 이런 포스터가 넘쳐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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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 왕자(챔피언) 일지도 모른다"
"꿈이 있는 자여, 오라"

이 문구에 가슴 두근두근 했던 소년들이 한 둘이 아니야. 하지만 동아체육관에 간다고 해도, 1400명 중 관장님 눈에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며칠 나오다가 나가 떨어진 사람이 수두룩 했대. 그런데, 수없이 드나드는 이 관원들 사이에 공기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어. 바로 이 청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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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득구, 17살이였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라도, 항상 체육관에 있어. 그런데 문제는, 복싱과 영 거리가 멀어 보여. 키도 좀 작고 주먹도 약해. 그런데 소년 김득구는 항상 체육관에 와서 지칠 줄 모르고 폭풍 줄넘기, 혼자 구석에서 계속 연습을 하는데 이미 눈빛은 챔피언이야. 그리고 득구는 아령 운동할 때, 끈을 아령 양 쪽에 감은 후 그걸 입으로 들어 올리는 운동을 했어. 턱 힘을 기르는 맷집 훈련이야. 또 체육관 앞 나무에 매단 큰 타이어를 야구 배트로 있는 힘껏 내리쳤어. 팔 힘을 기르는 훈련인 거야. 이 친구, 훈련 방식이 범상치 않아.

득구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의 한 어촌마을. 한국전쟁 이후 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때야.

"득구네 집은 집 앞이 모래사장이고 바로 앞이 바다예요. 부엌 하나, 방 하나, 그리고 화장실은 밖에 오막살이 식으로 있었어요. 동네에서 최고 가난한 집이었어요."
-이상봉, 동아체육관 동료

득구 아버지는 작은 고기배를 몰았고. 어머니는 미역을 주어다 팔았어. 겨우 감자와 옥수수만 먹고 컸는데, 그마저도 하루에 두 끼 먹으면 다행이었대. 형편이 어려워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곧장 속초로 가서 돈을 벌었어. 새벽 4시부터 밤까지 제과점에서 일했는데, 아무이 일해도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어. 결국 15살 득구는 큰 결심을 했어. 서울로 가자고. 가족들이 다 잠든 사이에 조용히 짐을 싸서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득구를 붙잡아. 그리고 "이거라도 가져라"라며 뭔가를 내밀어. 어머니는 꼬깃 꼬깃 접어둔 3천원을 득구 손에 쥐어 주셨어. 마음이 아프지만, 붙잡을 수도 없었을 거야. 더 이상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했을테니. 득구는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눈물을 꾹 참고 집을 나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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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울에 온 득구는 당시 '기아 바이'라 불리던, 외판원 일을 시작했어. 득구는 비슷한 자기 또래 교복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책을 팔았어. 그러던 어느날, 득구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찾아와. 그날따라, 오르는 버스마다 자리가 텅 비어있어. 심지어 거리에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책을 팔러 다방에 갔는데, 사람이 다 거기 모여있어. 바글바글 모여서 뭘 보나 했더니, TV로 복싱 중계를 보고 있던 거야. 득구도 홀린 듯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자기도 모르게 함께 보며 응원했어. 당시 경기는, 동양 챔피언 김현치 선수의 세계 챔피언 도전 경기였어. 김현치 선수는 동아체육관의 관장이기도 해. 그리고 얼마 후, 득구는 김현치 관장이 운영하는 체육관을 찾아 갔어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관장님이 못 다 이루신 세계 챔피언의 꿈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그 때부터 득구는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운동하면서 지냈어. 형편이 어려우니 돈도 벌어야 했던 득구는 남영동 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고, 노량진 체육관까지 두시간을 뛰어서 갔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 동양 챔피언 자리에 오른 김득구

그런 득구를 유심히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어. 동아체육관의 김윤구 코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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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가르치다 보면 한눈에 나타나요. '저 놈 가르치면 선수 되겠다' 김득구 선수가 말도 잘 듣고 열심히 했어요. 다른 선수들보다 근성이 있어요. 깡이 있다고 할까? 농땡이 잘 안 쳐요. 혼자라도 열심히 하고 그래요. '아, 요놈은 열심히 시키면 되겠다' 싶었죠."
-김윤구, 당시 동아체육관 코치

드디어 득구에게 기회가 왔어. 1400명 관원들 중에서 신인 경기 4라운드에 출전할 기회를 잡은 거야. 이건 요즘 아이돌 데뷔 경쟁에서 살아남음 셈이야. 1978년 제 8회 전국 프로 복싱 신인왕전. 득구는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 대회에서 3일동안 3경기를 했는데 2승 1패를 했어. 이 정도면 성공적인 데뷔야. 이 때 패배를 끝으로, 득구는 지는 법이 없었어. 게다가 첫 경기는 판정승으로 이겼거든. 그러다 차차 KO 승이 쌓여가는 거야. 득구의 펀치에 힘이 붙었다는 거지. 그렇게 프로 데뷔 2년만에, 득구는 한국 챔피언 자리까지 올라. 끈기와 깡으로, 득구가 해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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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은 항상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득구는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이 찾아와서 늦은 시간 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어. 그러다 눈을 떴는데 훈련시간에 늦은 거야. 체육관으로 뛰어갔지만, 관장님은 득구를 용서하지 않고 당장 체육관에서 쫓아냈어.

그리고 며칠 후, 상봉이한테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어. 상봉이가 깜짝 놀라 달려가보니, 득구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 복싱을 그만둬야 한다는 괴로운 마음에,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선택을 한 거야. 그때 득구가 쓴 글이 있어.

"나는 젊음을 권투에 걸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두 주먹 뿐 아닌가. 오직 미래의 영광스러울 그날만을 기대하며 뛰고 있는 나에게 권투를 그만두라는 것은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득구는 3일만에 깨어났어. 관장님은 '그런 각오라면 죽기 살기로 다시 해보라'고 마지막 기회를 줬어. 그날부터 득구는 완전히 달라졌어. 매일 이렇게 다짐했대. '체육관에서 흘리는 땀 한 방울은, 링 위의 피 한 방울과 맞바뀐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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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득구의 인생을 바꿀 첫번째 기회가 왔어. 현 라이트급 동양 챔피언인 김광민 선배와의 경기야. 여기서 승리하면 선배의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뺏어 오는 거야. 그런데 김광민은 별명이 '링 위의 불도저'였어. 힘이 장사이고 체력도 맷집도 좋아. 대부분이 김광민이 우세하다고 생각했어. 그럼 득구에겐 승산이 없는 걸까?

득구는 조금 특이한 복서였어. 일명 '사우스포(Southpaw)', 왼손잡기 권투선수야. 사우스포 선수들은 방어적인 스타일이 많은데, 득구는 드물게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어. 오른손 잡이 복서한텐 다루기 힘든 상대야. 이런 스타일의 복서로 필리핀 매니 파퀴아오가 유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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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82년 2월 28일, 경기가 시작됐어. 경기 초반부터 난타전을 벌인 두 선수. 득구가 강하게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김광민은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기회를 노렸어. 9라운드에서 김득구의 오른손 펀치를 강하게 맞은 김광민은 무릎을 꿇고 다운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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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을 못하고 간신히 버틴 김광민. 결국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으로 득구가 승리했어.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엄청난 이변이었어. 잡지며 신문이며 김득구 이름 석자가 대서특필됐어. 구두 닦고 껌 팔던 청년이 동양챔피언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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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밸트를 품에 안은 득구는 고향 고성으로 갔어. 완전 금의환향이었어. 마을은 잔치 분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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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구는 어머니한테 봉투부터 내밀었어. 무려 3백만원. 경기 끝나고 받은 대전료를 그대로 들고 온 거야. 당시 3백만원이면, 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어. 득구는 하나를 더 내밀었어. 고등학교 졸업장이었어. 득구는 운동하는 틈틈이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까지 들어간 거야. 득구는 큰형과 소주도 한 잔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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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구가 날 보고 '형님,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논 한 만 평이면 거진읍에서 제일 부자니까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앞으로 형님 10년만 고생해요. 챔피언이 돼서 그렇게 할 테니까.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새집에서 같이 살게끔 마련해준다'길래, 내가 '말만 해도 고맙다. 너 몸이나 다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고 했어요."
-김근식, 김득구 큰형

득구는 가진 건 없어도 마음이 부자인 청년이었어. 득구의 일기에 이런 글도 남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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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은 가문도 뼈대도 재산도 정말 별 볼 일 없는 시골의 제일 가난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고향의 넓은 바다와 붉은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1982년 4월 8일 자, 김득구 일기 중

▲ '사생결단' 의지로 준비한 운명의 경기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과 코치님이 득구를 불러 물었어. "너 미국에서 경기 뛰어 볼래?"라고. 그렇게 꿈꾸던 세계 챔피언 도전 기회가 온 거야. 상대는 WBA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 미국의 레이 맨시니. 사정없이 펀치를 '붐붐' 휘두르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레이 붐붐 맨시니'라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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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 기술, 파워, 스피드 모든걸 다 갖춘 무결점 복서야. 인기도 최고고, 아버지가 유명한 권투 선수, 형도 권투선수인 복싱 금수저 집안이야. 맨시니의 전적은 24전 23승 1패. 24전 중에 KO 승은 19경기로, 거의 대부분이 KO승이야.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중에 15경기는 3라운드 안에 끝냈어. 정말 핵주먹이란 얘기지. 이런 선수한테 득구가 상대가 될 까? 너무 센 상대야. 게다가 원정 경기는 장거리 비행 때문에 컨디션 유지도 어렵고, 열정적인 미국 관중들에 주눅 들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어. 모든 상황이 맨시니한테 유리해. 이 정도면 시합의 흥행을 위해, 맨시니의 재물로 김득구가 선택된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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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경기가 예상되는데, 득구는 고민도 없이 경기를 받아들였어. 그리고 "죽기 전에는 링에서 안 내려오겠습니다"라고 각오를 전했어. 이 경기 하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 또 득구가 이 경기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득구한테 새로운 가족이 생길 거 같거든. 얼마전에 득구는 조촐한 약혼식도 올렸고, 곧 있으면 아이도 태어날 거야. 득구는 내 아이에겐 절대 가난을 물려주지 않고 반드시 세계 챔피언이 돼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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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한달 앞. 관장님, 김코치, 득구와 훈련 파트너 응식이는 퇴계로에 있는 한 호텔에 캠프를 차렸어. 호텔에서 남산 순환도로를 지나 팔각정까지 달리는데, 코스가 13km고 경사도 엄청 급해. 그런데 득구는 속도 한 번 안 줄이고 독하게 달렸어. 그 다음은 쉐도우 복싱. 그리고 오후엔 체육관에 가서 스파링을 하는 거야. 득구는 하루 평균 5번, 출국 전까지 150번이나 스파링을 뛰었어.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어.

"진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대. 득구는 출국 며칠 전엔 체육관에 뭔가를 들고 왔어. 검은 칠을 한 관이었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기고 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관을 만들어 온 거야.

"제가 맨시니를 여기에 넣어서 오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여기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미국에 가는 날. 득구는 관장님 코치님과 짐을 쌌고, 응식이가 그 길을 배웅했어. 응식이는 "꼭 세계 챔피언 돼라. 우리들의 꿈 네가 제일 먼저 이루고 와"라며 배웅했고, 득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어.

목적지는 로스앤젤레스. 교민들이 있는 곳에서 적응부터 하기로 했어. 도착한 첫날, 시차 때문에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몽롱해. 더 큰 문제는 훈련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거야. 이들이 선택한 곳은,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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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구한텐 여기가 최고의 훈련장이야. 매일 아침 그 산을 뛰어 올라가고, 오후엔 아무 체육관이나 찾아가서 스파링 상대를 찾았어.

경기가 5일 앞으로 다가왔고, 시합장이 있는 라스베가스로 이동했어. 시저스 팰리스 호텔 야회 특설링에서 경기가 열려. 숙소는 같은 호텔 1288호실. 코치는 득구한테 마인드 컨트롤 할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자리를 자주 비웠대. 그런데 자리를 비운 코치가 방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대. 벽, 전등 갓 등 눈에 보이는 곳들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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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맨시니! 널 죽이겠다!"

"죽느냐 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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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구도 알고 있던 거지. 맨시니와 본인의 전력차가 크다는 걸. 그래서 이렇게 정신력을 계속 다진거야. 심지어 하얀 천에 '사생결단'이라 써서 머리띠로 두르고 연습을 했대. 맨시니를 꼭 KO 시키겠다는 각오가 아주 단단했어.

1982년 11월 12일, 경기 하루 전날. 이날 계체량이 진행됐어. 경기 전 체급 규정에 의해 선수들의 체중을 재는 거지. 득구는 한국에서부터 체중 조절을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이 가뿐했대. 정작 긴장되는 건 따로 있었어. 체중 잴 준비를 하는데, 저 쪽에서 누군가 걸어와. 바로 운명의 상대, 레이 맨시니야. 둘의 첫 대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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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체중은 61.23kg이야. 득구는 60.7kg로 가뿐히 통과했어. 맨시니 역시 통과. 이렇게 계체량을 끝내고 바로 기자회견이 열렸어. 득구는 동양의 작은 나라의 무명 복서일 뿐이야. 세계 챔피언 맨시니한테 당연히 플래시 세례가 집중돼. 하지만 득구는 기죽지 않아. "복싱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 입니다. 이길 확률은 50대 50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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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결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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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날이 밝았어. 호텔 앞에는 야외 특설링이 설치됐어. 무려 8천명의 관중이 모였어. 근데 이들은 거의 맨시니 팬이야. 경기장엔 '붐붐' 소리가 가득해. 근데 그 사이로, 간간이 뭐가 보여. 태극기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응원하러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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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 한국에서 온 김득구" 호명과 함께 득구가 먼저 링 위에 올랐어. 긴장한 기색 없이 경쾌하게 몸을 풀어. 바로 그때, 경기장이 떠나가라 환호가 쏟아져. "레이 붐붐 맨시니" 맨시니가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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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와의 원정경기,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득구와 코치는 선제공격 전략을 세웠어. 득구의 순발력이 좋으니까 초반부터 무조건 퍼부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어. 1라운드 종이 울리자마자 득구는 정신 없이 공격을 퍼부었어. 맨시니는 챔피언답게 득구의 얼굴에 핵주먹을 막 꽂아. 득구는 데미지 없이 반격을 했어. 맨시니의 일방적인 공격이 아니라, 팽팽한 접점이 펼쳐졌어. 선제공격 전략이 먹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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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라. 3라운드, 맨시니가 폭풍 공격을 해와. 득구는 그걸 다 막아내더니, 두 팔을 번쩍 끌어 올려 만세를 해. '나 끄떡없어'라며 맨시니를 도발하는 거야. 득구가 전혀 밀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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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는 한국에도 생중계 됐어. 그 때가 일요일 낮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여서 경기를 시청했어. 불리한 경기라 했는데, 세계챔피언이랑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득구를 보며 다들 감탄했어.

미국 중계에선 "김득구는 맨시니 주니어라 불리는데요, 이제 맨시니가 김득구 주니어가 될 판이네요"라는 말도 튀어 나왔어. 해설진도 득구의 투지에 깜짝 놀란 거야.

어느덧 9라운드까지 왔어. 상황은 오히려 맨시니 쪽이 안 좋아 보여. 눈을 붓고 얼굴은 시뻘개. 3, 4라운드에 쓰러질 줄 알았던 김득구가 여전히 덤비고 있어. 맨시니 마음이 급해져. 10라운드, 심판이 경기를 갑자기 멈췄어. 득구의 반칙이 선언됐거든. 감점까지 당했어. 그리고 이 때부터 문제가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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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구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11라운드가 되니까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맨시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했어. 그리고 득구를 밀어 붙여 강타를 날려. 득구의 위기야. 득구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위태로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어.

12라운드 종료. 그리고 마의 13라운드가 찾아와. 득구는 선수생활 하면서 13라운드 이상을 해본 적이 없어. 경기를 하는 거 자체가 도전이야. 시작부터 다리가 후덜거려. 몸이 말을 안 들어. 하지만 득구는 또 다시 일어섰어.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버티고 버텼어. 그리고 그 때, 초인적인 힘으로 주먹을 날렸어. 맨시니가 휘청거려. 맨시니도 많이 지쳤다는 거야. 이 경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이제 2라운드 남았어. 맨시니를 보니 눈이 퉁퉁 부었고, 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 김코치는 가뿐 숨을 몰아쉬는 득구를 마사지하며 차분히 얘기했어. "이제 2라운드 밖에 안 남았다. 힘 남길 필요 없어, 다 쓰고 와"라고.

이제 14라운드. 득구는 몸을 일으켜 다시 링 위로 나갔어. 김코치는 득구를 슬쩍 보고 물과 의자를 챙겨 링 밖으로 나왔어. 그런데 바로 그 때, 관중들의 환호가 귀를 때릴 듯이 퍼져. 누군가가 다운됐다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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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사람은 득구였어. 14라운드가 시작된지 단 19초 만이었어. 달려나오는 득구를 향해 맨시니가 회심의 라이트를 날렸고, 득구는 가드를 올릴 힘도 없이 그대로 맞았고, 휘청대는 득구한테 펀치가 한대 더 날아와. 턱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쓰러졌는데, 이건 누가 봐도 결정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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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득구는 포기하지 않았어.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로프를 잡고 일어났어. 링 코너에 겨우 기대선 득구에게 심판은 양팔을 흔들고 맨시니의 KO 승을 선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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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로프를 잡고 있던 득구는 얼마 후 다시 쓰러졌어. 그런데 이번엔 득구가 안 일어나. 뭔가 심상치 않아. 김코치가 급히 글러브를 벗기고 신발끈을 풀고 몸을 마사지 하는데, 득구가 미동이 없어.

▲ 결국 눈을 뜨지 못한 김득구

병원으로 후송된 득구의 긴급 수술이 진행됐어. 너무 많이 맞아서 뇌에 피가 고인 거 같대. 두시간 반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는데 결과는 안 좋아. 의식이 안 돌아와. 과다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 김코치는 일정에 맞춰 먼저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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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병원에 놔두고 비행기 타고 오니까. 눈물이 나서 못 오겠더라고. 비행기 화장실에 앉아서 오다시피 했어요. 눈물이 나서… 그냥 누구하고 말도 하고 싶지도 않고. 자꾸 눈물이 나오니까 화장실에 가는 거죠."
-김윤구, 당시 동아체육관 코치

그리고 얼마 후에 비보가 전해져. 김코치가 떠나고 이틀 후, 담당의사가 득구에게 뇌사 판정을 내렸어. 뇌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의학적으로 깨어날 가망성이 없대. 이 소식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해졌어. 아들 경기를 TV로 보셨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12라운드에 정전이 돼서 득구가 쓰러지는 장면을 못 보신거야. 어머니는 급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어.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아들 득구가 누워있어. 아무리 불러도 아들은 대답이 없어. 그런 어머니에게 병원 측은 '지금 아드님은 보조장치에 의존해 숨쉬고 있습니다. 장치를 뗄지 결정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했어. 뇌사 상태, 맥박도 있고 호흡도 있는데 뇌기능이 정지됐어. 미국은 뇌사를 법적 죽음으로 인정해. 근데 한국은 아니잖아. 어머니는 너무 혼란스러워. 내 아들이 여기 있고, 숨도 쉬고 심장도 뛰고 손을 잡으면 따뜻한데. 근데 보조장치를 떼고 보내주라는 거야. 제 손으로 아들 목숨을 끊는 것처럼 느껴져 어머니는 뜬 눈으로 하루를 보냈어. 그리고 결정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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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이 최선을 다하여도 살리질 못했으니 선생님을 이제 그만 괴롭히고 (호흡기 떼는 것을) 내가 허락을 했습니다. 내 자식은, 김득구 선수는 세상을 떴거니와. 내가 나라에다가 바치고 갑니다. 그런지들 아슈…"
-김득구 어머니

결국 호흡기를 떼고 김득구 선수에게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졌어. 이 때 나이가 고작 스물넷. 챔피언 벨트를 못 따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던 그 말이 사실이 됐어. 득구의 장기는 미국에 기증됐어. 미국 언론은 '아름다운 선물'이라며 득구의 장기기증 소식을 보도했어.

미국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득구의 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됐어. 이기고 돌아올 때 입겠다던 정장은 수의로 입혀졌어. '권투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꼬꼬무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득구를 배웅했던 동료 응식이가 득구의 영정사진을 안았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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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서 깨어날 줄 알았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죠. 애들이 가슴이 다 아프지 뭐. 그건 남 일이 아니었거든요. 내 자신이 그렇게 된 거처럼 마음이 다 아팠죠."
-김응식, 김득구 동료

가난한 복서들의 희망이자 영웅이었던 김득구. 함께 운동하던 동료들한텐 남의 일 같지 않았대. 같은 꿈을 꿨던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가진 건 두 주먹 밖에 없었던 김득구는 고향땅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혔어.

김득구 선수가 사망하고, 그의 앞으로 꽤 큰 돈이 모였어. 약속된 파이트 머니, 보험금, 위로금까지 5천만원이 넘는 큰 돈이였어. 사람든은 죽어서야 큰 돈을 만지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어. 근데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

꼬꼬무

아들을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득구 어머니. "젊은 것이 고생만 하다가 억울하게 갔구나. 이게 다 나 때문이야"라며 계속 자책하셨대. 어머니는 매일 득구가 쓰던 낡은 글러브를 안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날이 이어졌어. 아들을 떠나 보낸 그리움이 사무친 어머니도 득구 곁으로 가셨어. 득구가 떠나고 두 달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거야.

▲ 41년만에 듣는 그의 이야기

이어진 비극에 고개를 숙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득구와 링 위에 섰던 레이 맨시니 선수. 맨시니는 경기 이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어. "네 탓이 아니다", "경기의 일부일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살인 복서"라고 수근대는 사람도 많았대.

'꼬꼬무'가 미국에서 직접 맨시니를 만나 41년만에 이야기를 들었어.

꼬꼬무

"(김득구와의 경기는) 제가 포기할 수도 있다고 느낀 유일한 경기였어요. 왜냐하면 후반 라운드로 갈수록 김득구의 펀치로 저도 힘들었거든요. 제 기억으론 그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때렸어요. 온 몸의 힘을 다해서 때렸어요. 제 입장에서도 장기전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 라운드라도 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무척 아팠거든요. (김득구를 다운 시킨 후) 코치가 좋은 경기였다고 칭찬해주고 그도 자기 코너로 돌아갔어요. 근데 전 제 자리로 돌아가느라고 그가 의자에서 쓰러지는 걸 보지 못했어요. 사람들이 그를 실어나갔다는 걸 몰랐어요. 나중에야 들었어요. 김득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안 느낄 수 있겠어요? 끔찍했죠. 심장에 칼을 맞은 기분이었어요. 제 손에 죽은 거잖아요. 사실 그 경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싸우기가 힘들어졌어요. 싸우기 싫더라고요. 저 스스로 제일 괴로웠던 건, 왜 내가 아니라 그 일까. 왜 내가 아니라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레이 맨시니

맨시니에게도 평생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경기였어. 제대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던 맨시니는 결국 스물넷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해. 맨시니는 득구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이기도 해. 그에게 김득구 선수에 대한 기억을 물어봤어.

꼬꼬무

"링에서의 그는 궁극의 전사였습니다. 전사 그 자체였습니다. 링에서 함께 있는 40분 동안은 그의 약혼녀, 어머니, 절친보다도 제가 그를 더 잘 알았을 겁니다. 파이터 간의 긴밀한 관계가 있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얼마나 이기고 싶었는지 정신력이 어땠는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겁니다. 살다 보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예상 못 했던 일들도 일어납니다. 그게 인생이잖아요. 내가 죽은 뒤 언젠가 김득구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김득구를 다시 만나면, 뭐라고 말하고 싶냐는 물음에 맨시니는 이렇게 대답했어. "안녕 내 친구, 사랑한다네"라고.

꼬꼬무

많은 사람들이 김득구 선수를 '경기하다 죽은 선수', '비운의 복서'라 기억해. 하지만 그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용기있는 도전자', '투지의 사나이'라 말해. 그를 두고 왜 이리 무모한 도전을 했냐 할 수도 있지만, 죽음이란 결과보단, 꿈을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청년의 결기로 기억되길.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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