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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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과자에 독극물 넣겠다" 식품회사마다 협박한 범인의 정체는?

강선애 기자 작성 2023.01.13 12:25 수정 2023.01.13 13:06 조회 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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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2일 방송된 '협박범의 편지-4천만 대국민 인질극'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소이현, 윤박, 그룹 아스트로 멤버 문빈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식품회사에 도착한 협박 편지

때는 1984년 12월. 모두가 들떠있는 연말 분위기 속, 서울의 한 신문사도 시끌벅적해. 기자들이 한가지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그 소문은, 최근 식품회사가 누군가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는 거야. 식품회사가 협박을 당한다니. 위생 청결 위반 사항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데 1985년 새해가 밝은 후, 이 신문사에 의문의 편지가 날아왔어. 수신인은 신문사 사회부장, 발신인은 '서울대 이길남'이라 적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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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이길남이라는 사람한테 편지가 왔어요. 내가 어떤 식품회사 사이에서 협박을 하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왜 보도를 안 하느냐라는 편지였어요"
-김종래, 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

편지를 본 기자들 사이에선 '장난 편지다', '떠돌던 소문이 사실일 수 있다'는 의견이 분분했어.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났을 때, 신문사 문을 열고 한 기자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어. 그는 말했어. "부장님, 이 협박사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거 협박을 받고 있는 식품회사가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이날 취재된 내용은 특종 기사로 나왔어. "식품 3사에 독극물 협박. 3천만원 안 내면 끝장"이라는 타이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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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주지 않으면 식품에 독극물을 넣겠다는 협박이야. 만약에 아이가 먹는 과자에 독이 들었다면? 끔찍한 일이지. 남녀노소 불문, 누구든 독극물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야. 전국민을 인질로 삼은 협박사건이 벌어진 거야.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한 달 전. 한 식품회사 사장실로 총무부 직원이 뛰어 들어와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를 전달했어. 그 편지를 받아 읽는 순간, 사장의 얼굴은 사색이 됐어. 뭐라고 적혀 있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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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께 드립니다. 저희들은 전과자들로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가자고 약속하고 생활해 하고 있는 갱생회의 17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임입니다. 일금 3천만원을 1984년 12월 27일 하오 1시까 OO은행 원영일 앞으로 입금을 부탁드립니다. 만일 이러한 사항을 무시하시게 된다면 저희들은 수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식품의 모든 제품에 청산가리를 투입시키겠습니다. 인출 과정에서도 방해하실 생각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수사 의뢰를 하시어 1, 2명이 체포된다 하더라도 나머지 회원들에 의하여 결행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며 공갈 협박으로 생각지 마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원영일 협박 편지 내용 中

80년대에 3천만원이면, 현재 가치로 1억원 정도 되는 돈이래. 보낸 사람은 갱생회의 대표 원영일. 정중해 보이지만 알려준 계좌로 3천만원을 입금하지 않으면 청산가리를 넣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 편지야. 당시 이 협박편지를 받은 사장님을 '꼬꼬무'가 어렵게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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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내용은 며칠까지 돈을 입금 안 했을 경우 독극물을 슈퍼, 판매점에 (있는 식품에) 주입하겠다는 거죠. 일이 벌어진다면 식품회사 사장으로서 엄청난 충격 아닙니까? 무한대의 책임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전응덕, 당시 삼양식품 사장님

전응덕 사장님은 회사의 오너는 아니지만, 최종 결정을 하는 CEO야. 식품에 독극물이 나오면 이 분이 엄청난 책임을 져야해. 직원들 사이에선 이게 장난이 아니냐 했지만, 전 사장은 단순히 장난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어. 얼마 전에 일본에서 '모리나가 사건'이라고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범인이 일본 사건을 흉내냈다고 생각하니,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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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나가 사건'은 1984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식품회사 연쇄 협박사건이야. 당시 협박 받은 회사들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회사들로, 일본 메이저급 회사들이 모두 협박을 받았어. 요구 조건은 13억엔. 요즘 환율로 120억원이 넘는 돈이야. 이 일을 저지른 범인은 스스로 '괴인 21면상'이라 부르며 협박을 일삼고 경찰들을 조롱해. 그리고 언론에 "전국의 어머니들에게. 독극물이 든 과자를 슈퍼마켓 진열대 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는 범행 예고 경고장도 보냈어. 예고대로 범행은 실행됐어. 실제로 독극물이 들어간 모리나가 제품이 발견된 거야.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모리나가는 판매량이 90% 급감하며 도산 위기에 처했어. 이 사건으로 식품 업체들이 입은 손실액은 무려 500억엔. 지금 가치로 따지면 4800억이 넘는 금액이야.

그런데 일본은 이 협박범을 잡지 못했어.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검거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빠져나갔대.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도 비슷한 협박 사건이 발생한 거야.

▲ 눈 앞에서 놓친 범인

범인이 수사가 시작되면 청산가리를 투입하겠다고 협박했는데, 그냥 신고를 해야할까? 그렇다고 범인이 시키는 대로 돈을 줄 수도 없어.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전응덕 사장님은 이런 결정을 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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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경찰에 신고해야죠. 정정당당하게 신고하고 수사에 협조해야죠. 결국 사회정의를 위해서 범인하고 타협할 수는 없지 않나. 범인을 체포하는데 당국에 협조하기로 결정을 내렸죠."
-전응덕, 당시 삼양식품 사장님

12월 28일. 삼양식품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됐어. 경찰은 편지에 쓰인 이름과 주소부터 확인했는데, 전부 가짜야. 편지에 남겨진 또 다른 단서, 계좌번호. 안타깝게도 이 때는 금융실명제 전이라 신분증이 없어도 아무 이름으로나 통장을 만들 수 있던 시절이야.

경찰은 해당 은행을 찾아갔어. 계좌는 용두동 지점에서 개설된 걸로 파악이 돼. 범인의 계좌에는 6천만원의 돈이 들어 있었어. 그런데 돈이 입금된 날짜를 확인해보니, 하루 전에 누군가 3천만원을 보냈고, 오늘 또 3천만원이 입금됐어. 알고보니 다른 식품회사들에서 입금한 돈이었어. 전응덕 사장님의 식품회사 말고, 또 다른 식품회사들의 범인에게 협박 받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다행인건, 아직 돈이 인출되지 않았어. 경찰은 원영일의 계좌부터 지급정지 시켰어. 그리고 그 계좌로 돈을 인출하는 사람을 신고해달라 요청했어.

다음날 오후. 용두동 지점에 전화가 걸려와. 어떤 남자가 자신이 수사기관 소속이라며, 은행 직원에게 "수사 요청 받은 게 있냐"고 물어. 전화를 받은 직원은 "그런 일 없다"고 대답했어. 그러자 그 남자는 바로 전화를 끊었어. 은행직원은 이 사실을 곧바로 경찰에 알렸고, 경찰은 용두동 지점에 출동했어. 경찰은 은행직원들에게 누군가 원영일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면, 형사들에게 즉각 사인을 주라고, 작전을 세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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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양복 위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와서 은행 직원에게 통장을 내밀고 인출을 요청했어. 예금주를 확인하는데 이름이 원영일이야. 그런데 이 은행은 형사들이 잠복 중인 용두동 지점이 아니야. 범인이 은행 본점에 나타난 거야. 해당 은행 직원은 원영일 통장에 입금된 6천만원을 인출하려 했어. 그런데 계좌 정보에 '지급정지' 표시가 떠. 그걸 본 직원이 "고객님, 지급 정지가 돼있으시네요. 용두동 지점에 가서 확인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라고 친절하게 상황을 말해줬어. 도대체 왜? 알고 봤더니, 이 창구직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 전달받은 게 없었던 거야. 게다가 이 때는 은행 시스템이 '지급정지'만 표시되고 그 이유까지는 나오지 않았어. 결국 범인을 눈 앞에서 놓쳤어.

수사팀은 비상이 걸렸어. 곧바로 원영일 계좌로 돈을 보낸 식품회사들을 조사했어. 협박편지를 받은 회사는 전응덕 사장님의 회사를 포함해 총 세 곳. 세 회사 모두 원영일의 편지를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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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A식품회사는 원영일의 편지가 오기 2주 전쯤, '오영권'이란 이름으로 협박편지를 받았어. 이 편지에도 3천만원을 안 주면 독극물을 넣겠다고 써있었어. 그리고 오영권은 요구한 게 하나 더 있었어. 돈을 주겠다면, 12월 17일자 신문에 '사람을 찾습니다 오영권 부친 위급 급 귀가' 라고 광고하도록 지시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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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암호' 광고야. 어떤 접촉도 없이 신문만 보고, 협박한 회사의 의사를 확인하겠다는 거야.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

A식품회사는 오영권의 요구대로 신문에 광고를 내긴 했지만, 다방으로 돈을 가져오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어. 그 뒤로, A사에 두 통의 협박 편지가 또 왔어. '최춘식'이란 이름과, '이길남'이라는 이름으로. 이 중 '이길남'은 앞서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자신을 서울대생이라 소개했던 바로 그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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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12월에만 4명의 이름으로 협박 편지가 온 거야. 이 모든 협박 편지는 한 사람이 보낸 걸까, 아니면 조직 범행일까?

▲ 협박의 강도를 높이는 범인들

경찰은 공개 수사를 할지, 비공개 수사를 할지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어. 당시 경찰의 선택은 비공개 수사였어. 사건이 드러났을 때의 사회적 혼란을 걱정한 거야. 범인이 수사가 시작된 걸 알면 실제로 독극물을 넣을 수가 있잖아. 게다가 1년 후는 아시안 게임, 88년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대외적으로 식품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국제적인 망신이야. 그래서 경찰은 비공개로 수사하기로 했어.

수사가 시작되고 열흘 뒤, 또 한통의 편지가 날아와. 보낸 사람은 원영일. 은행에 가서 돈을 못 찾은 그 사람이야. 이번엔 B식품회사로 편지를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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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께 드립니다. 저희들 모두가 회장님의 아량에 감사를 느끼며 새해부터는 열과 성을 다하여 열심히 생활하여 회장님의 은공에 보답을 하자고 희망차 있던 중 인출을 하려하니 지급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해 놓으셨던 점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희 갱생회 회원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인정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쉽게 감동하고 열중을 하다가도 실망을 하게 되면 지극히 포악한 성미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회원 중 일부인 9명은 실제적으로 투약할 약품과 기구들을 가지고 뛰쳐나가는 것을 간신히 만류하고 회장님께 간청을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이렇게 서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원영일 협박 편지 내용 中

정중한 말투지만, 계좌 지급정지를 풀지 않으면 독극물을 넣겠다는 협박이야. 그렇다고 협박범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어. 편지를 보내고 사흘 뒤, 협박범은 은행에 또 나타났어. 이번엔 인천 부평지점에서 직원에게 통장을 내밀며 6천만원을 모두 인출해 달라고 했어.

직원이 계좌를 조회하니 역시나 '지급정지' 표시가 떠. 이번에 직원의 행동은 좀 달라. 직원은 지급정지의 이유를 확인하려고, 용두동 지점에 전화를 걸었어. 용두동 지점에서는 "그 사람 범인이니까 무조건 시간 끄세요"라고 알려줬지만, 하필 그 타이밍에 통화상태가 안 좋아서 부평지점 직원이 제대로 못 들었어. 바로 그 때, 범인이 창구 너머로 손을 쭉 뻗어 전화를 바꿔달라며 수화기를 빼앗아 갔어. 이 남자는 전화를 수화기 너머로 "아직 지급정지가 풀리지 않았냐"고 물었어. 그러더니 전화를 확 끊고 재빨리 은행을 빠져나가. 경찰이 도착했을 땐 이미 범인이 떠난 후였어. 또 범인을 놓친 거야.

범인이 인출에 또 실패하고, A식품회사로 두 통의 협박 편지가 날아왔어. 그런데 내용이, 그 전 보다 살벌해. 첫번째 편지는 '이길남'에게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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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이길남이외다. 각설하고 지난번 편지는 잘 받아 보았으리라 믿소. 우리의 요구가 한낱 정신질환자의 헛소리로 거절당하고 말았을 경우에 우리가 해나갈 일을 미리 선고하겠소. 우리가 무시당한 이상으로 우리 목적 달성의 성숙 단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얼마나 철저한지 두고 보시지. 내일(10일) 오전 말죽거리 OO슈퍼와 OO슈퍼에 가서 확인해볼 것. 물론 내용물을 맛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확인 불가능하다는 것. 경고 단계라 품명을 알려준다."
- 이길남 협박 편지 내용 中

이전의 협박편지보다 경고와 협박의 강도가 강해졌어. 이어서 편지가 또 도착해. 이번엔 '김지혜'라는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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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먼저 제가 누구인지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요즘 회장님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김지혜라는 여성입니다. 이길남이란 사람이 회장님과 모든 연락을 책임지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제가 이 무리에서 떠나려고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일한 여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4명 다 남자입니다. 그 외에는 그들의 신상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절대 금지사항이니까요. 1차로 가성소다(NaOH)로 경고하고 난 다음, 2단계로는 청산가리를 사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게 배당된 것은 이미 두 봉지 다 버렸습니다. 회장님, 이들과 협상을 하세요."
-김지혜 협박 편지 내용 中

편지 내용을 보면, 조직원은 총 5명이야. 이길남, 김지혜는 같은 조직이라고 써있고, 이제 실제로 실행에 옮긴대. 그러면서 장소와 과자 품명을 알려줬어. 1차는 경고, 2차는 청산가리 투입. 김지혜는 조직을 떠난다며 협상하라고 알렸어. 이걸 믿어야 할까.

▲ 결국 발생한 피해

편지가 오고 며칠 후, 잠실의 한 가정집. 할머니 생신을 맞아 일가친척들이 모여 잔치를 하고 있어. 귀염둥이 2살 손녀가 어른들 앞에서 애교를 부렸고, 어르신 한 분이 아이에게 과자를 줬어. 아이가 과자를 덥석 무는 순간,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해. 고통스러운지 입 안에 손을 막 집어넣어. 놀란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입 안의 과자를 뺐어. 아이의 입 안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해. 깜짝 놀란 엄마가 과자를 살펴보는데, 봉지 안에서 쪽지를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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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독약이 들어있으니 절대로 먹지 마십시오. 이 쪽지를 회사 회장님한테 전달하고 피해 보상을 요구하십시오"
-과자 속 쪽지에 담긴 메시지

문제의 과자는 할머니 친구가 근처 슈퍼에서 사온 A사 과자였어. 피해 아동과 부모님은 당연하고, 과자를 사온 어른들도 모두가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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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를 입게 씹고서 막 울고 혀에서 피가 나고. 애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막 보채니까 아이 엄마가 입으로 빨아내고 그랬는데 아이 엄마 혀에서도 피가 나고. 주변에 벌겋게 부스럼처럼 일어나서 병원에 가니까, 삼키지는 않았으니까 안심하라고 했어요."
-당시 과자를 먹었던 피해아동 아빠

과자를 판매한 슈퍼 주인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야. 슈퍼 주인은 동네에 독극물 나온 슈퍼라고 소문이 퍼져 손님 발길이 뚝 끊겨 매상이 떨어졌다고 괴로워했어.

국과수에서 분석한 결과, 이 과자에서 발견된 건 '탄산소다'라는 비누나 종이 만들 때 쓰는 분말이야. 독극물은 아니라 생명에 지장은 없어. 그래도 이 소식이 전해지며 협박 받은 식품 회사는 초비상에 걸렸어.

협박범이 보낸 편지에는 1차는 가성소다로 경고하고 2차는 청산가리 쓰겠다고 했잖아. 이번엔 이 정도로 넘어갔지만, 다음에는 진짜 독극물 테러가 일어날 수 있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정리해보면, 지금까지 협박편지를 보낸 이름은 총 5명이야. 원영일, 이길남, 김지혜, 오영권, 최춘식. 물증은 편지야. 지문이 남아 있을 수 있어 편지 정밀감식을 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었어.

다음은 필적 분석. 전문가들이 범인의 필적과 문체를 분석해서 범인의 특성을 추정했어. 범인들의 필적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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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 필적을 통해 어떤걸 알았을까. 먼저 원영일의 필적은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2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글자 획들이 떨어져 있고, 또박또박 쓴 느낌이야. 그리고 'ㅂ(비읍)' 쓰는 방법이 독특해. 평소 비읍을 이렇게 독특하게 쓰는 사람이라면, 협박 편지에 굳이 이렇게 쓰진 않았겠지. 이걸 본래 자신의 필적을 감추려고 하는 '은폐필적'이라고 한대. 그리고 띄어쓰기나 글자 간격을 봤을 때, 원영일은 어느 정도 고등교육을 받은 걸로 추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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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의 경우는, 은폐하지 않은 본인의 필적으로 보인대. 문체가 회유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이라, 여성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어. 그리고 편지에 가성소다를 굳이 화학기호(NaOH)로 표현했잖아. 이건 자신이 똑똑한 사람이란 걸 일부러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대.

이길남의 필적도 본래의 글씨로 보인대. 막힘없이 빠르게 작성한 편지 같대. 이런 점을 봐서, 다소 급한 성격으로 추정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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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권, 최춘식은 완전 은폐 글씨야. 오영권은 '12월 27일 낮'을, '낯'으로 썼어. '오영권 을 찾으면' 이라고 쓴 부분은 띄어쓰기가 틀렸어. 전문가들은 은폐를 위해 일부러 이렇게 틀리게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

최춘식도 '겄입니다'라고 썼어. 이것 또한 일부러 틀린 것으로 보여. 맞춤법이 틀린 것에 비해, 문장 부호는 정확하게 썼거든.

경찰은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이길남과 김지혜의 경우 가족이거나 가까운 사이일 거라 추정했어. 만약 조직 범행일 경우, 실무자인 원영일이 40대 가장이고, 이길남 김지혜가 자녀일 가능성도 있다고 봤어.

경찰이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보도를 한 거야. 신문사도 보도를 내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대. 우선, 사회가 받을 충격을 생각했어. 전국민이 먹는 먹거리에 대한 협박이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패닉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리고 식품회사가 입을 엄청난 피해도 예상돼. 이 때 당시 식품회사 전체 매출은, 5조 9천억원이었어. 당장은 지금 3개의 식품회사가 협박 받고 있지만, 식품업계 전체로 번지면 이 피해는 상상 이상이야. 그렇다고 보도를 안할 수도 없어. 공갈 협박을 받고 있는 건 기업이지만, 실제 피해는 국민들한테 가니까.

신문사는 보도를 하기로 결정했어. 대신 1면 톱이 아니라, 사회면인 11면에 기사를 실었어. 필요 이상으로 국민들에게 공포를 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너무 큰 충격을 주지 않으려 기사 배치부터 내용까지 신중을 기한 거야.

▲ 드디어 검거한 협박범

언론의 보도 이후, 돈 때문에 아이들 먹는 과자에 독극물을 넣으려 하는 협박범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어. 이런 상황에 협박은 오히려 더 심해졌어. 삼양식품에 '김성철'이란 이름으로 협박편지가 오고, 또 다른 식품 회사에 '윤철우'라는 이름으로 3천만원을 요구하는 편지가 도착해. 상황이 심각해지니 경찰은 결국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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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은행 직원이 본 인상착의를 토대로 범인 몽타주를 그려 배포했어. 현상금으로 5백만원을 걸어서. 그랬더니 제보가 쏟아져. 바로 그 때, 용산경찰서로 한 남자가 제보를 하겠다며 찾아와. 그 남자는 자신이 독극물 협박범을 안다고 말했어. 그런데 우물쭈물하며 신고를 하는게 맞나 갈등하는 표정이 역력해. 알고보니 그 제보자는, 협박범의 친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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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고 쭉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뭐 하나 잡히는 게 있어서. 혹시 친구 신 씨가 한 것이 아닌가… 모든 걸 생각해 봤습니다. 저희 아버님과 긴 상의 끝에 이런 것은 절대 신고를 해야 한다 해서 신고를 하게 됐습니다."
-협박범이 친구 같다는 제보자

제보자가 신문을 보는데 눈에 걸리던 게 있었대. 범인이 1월 7일 은행 부평지점에서 인출 시도를 했다는 부분을 읽을 때 온 몸의 소름이 돋았대. 바로 그날, 그 제보자가 친구 신 씨의 부탁을 받고 부평지점에 데려다 줬대. 그리고 신문에 실린 몽타주가 친구의 얼굴과 너무 비슷하대. 정황상 모든 게 맞아 떨어지는 결정적인 제보야.

경찰은 신 씨의 사진을 입수해 은행 창구 담당 직원한테 보여줬어. 담당 직원도 단번에 그 남자가 돈을 인출하려던 사람이 맞다고 했어. 신 씨의 전과를 조회했더니, 사기 전과가 있어. 두 차례에 걸쳐 3천만원씩 총 6천만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는 거야. 하필 금액이 또 3천만원이야.

형사들은 신 씨의 집으로 출동했어. 혹시나 놓칠까봐 식사도 차 안에서 해결하며 잠복한지 3일째.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 드디어 신 씨가 눈 앞에 나타났어. 그가 대문 앞에 다가왔을 때 형사들이 양팔을 낚아채서 검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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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바로 조사를 시작했어. 신 씨는 범행을 자신이 독극물 협박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어. 집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 통장과 도장이 없어. 근데, 그 통장을 본 것 같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바로 신 씨의 아내야. 며칠 전 아내가 신 씨의 코트 주머니 속 통장을 본 거야. 신 씨는 그 통장에 대해 다른 사람 심부름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거라고 둘러댔대. 또 아내는 사건이 실린 신문에서 몽타주를 보고, 남편과 닮아서 계속 찝찝한 마음이었대.

경찰은 신 씨에게 가족들이 쓴 진술서를 보여줬어. 그 진술서에는 아내가 통장을, 동생이 도장을 목격했다며 신 씨가 범인 같다고 직접 작성한 내용이 담겼어. 또 경찰은 은행 직원들이 신 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남자가 맞다"고 말한 순간을 포착해 사진으로 신 씨에게 보여줬어. 이런 것들을 보여주니, 신 씨는 고개를 떨구며 결국 자백을 했어.

그는 일본의 모리나가 사건을 보고 범행을 계획했고, 돈을 구하면 보험 대리점을 차리려고 했대. 이렇게 공개수사 5일만에 독극물 협박범을 검거했어. 이 소식에 가장 기뻐했을 사람은, 당연히 식품회사 사장님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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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잡혔구나 싶었어요. 기간이 단축된 거예요. 공개수사로 단축이 됐고 언론이 취재를 하기 시작해서 보도가 나오고 더 단축이 된 거죠, 범인 검거에. 고통은 따랐지만 결국 최선의 방법이었구나 생각을 한 거죠."
-전응덕, 당시 삼양식품 사장님

▲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은 그날의 사건

아직 공범에 대한 숙제가 풀리지 않았어. 협박편지는 7명의 이름으로 총 13통이 왔어. 신 씨의 자백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 신 씨는 이 중 원영일, 윤철우 이름으로 된 6통만 보냈다는 거야. 나머지 편지에 대해선 전혀 모른대. 자기도 신문을 보고 자신과 똑 같은 수법을 쓰는 범인이 또 있구나 했대. 그리고 자기는 편지만 썼지 과자에 아무 짓도 안 했대. 그 잠실에서 발견된 문제의 과자도 자기 짓이 아니라는 거야.

꼬꼬무

수사를 더 진행했지만 신 씨는 이 6통의 편지만 쓴 걸로 결론이 나. 그럼 이길남 김지혜 오영권의 이름으로 온 편지, 그리고 탄산소다를 넣은 범인은? 이 사람들은 아직도 미스터리야. 나머지 7통의 편지는 다른 범인이 한 걸로 생각됐지만, 결국 검거를 못하고 미제로 남았어.

아까 원영일의 필적이 '은폐필적'이라고 추정했잖아? 그럼 범인 신 씨의 실제 필적은 어땠을까?

꼬꼬무

아예 다르지. 특히 '비읍'이 특이한 필적이었는데, 실제 필적에서는 그것도 달라. 신 씨도 자신의 글씨를 숨기기 위해 꾸며서 쓴 거라고 진술했어. 그리고 범인이 고등교육을 받은 걸로 추정했잖아? 신 씨는 대학교 영문과를 중퇴하고, 영어교사 학원강사 일도 했었대. 어느 정도 추정이 맞은 셈이야.

신 씨는 재판에서 징역 10년의 형량을 받았어.

"국민 전체로 하여금 독극물의 공포 속에 몰아 넣어, 상당 기간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피고인의 형사책임은 극히 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
-신 씨 재판 판결문 中

신 씨는 범행 전에 어쩌면 가볍게 생각했을 수도 있어. 사람을 해치지 않고 그 기업의 돈만 뜯어내려 했으니까. 하지만 4천만 국민을 인질로 잡은 협박은 중대한 범죄야. 독극물 협박 사건은 '공갈죄'가 적용돼. 폭력이나 협박을 통해 재산상의 이익을 얻는 범죄야. 독극물을 넣을 생각이 없었더라도 협박만으로 처벌될 수 있어. 공갈죄는 최고 10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야. 단순히 거짓말로 협박하고 돈만 받으려고 하다가 큰 코 다치는 거지.

신 씨를 신고했던 친구는 총 3500만원의 현상금을 받았어. 경찰에서 준 500만원과 식품회사에서 준 현상금 3천만원이 추가된 거야. 3천만원을 얻기 위한 신 씨의 선택은 징역 10년형으로 돌아왔고, 신고를 한 제보자의 선택은 3500만원으로 돌아온 거야. 신 씨는 자신의 선택이 이런 결과로 돌아올 지 예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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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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