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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32명 사망한 성수대교 붕괴 참사, 예고된 '인재'였다

강선애 기자 작성 2022.12.02 12:52 수정 2022.12.02 14:31 조회 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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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예고된 추락-성수대교 붕괴 참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설현, 장혁진, 그룹 브레이브걸스 멤버 유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성수대교 위에 모인 평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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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이날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어. 오전 7시, 파란색 승합차 한 대가 빗길을 달리는데, 그 차에 타고 있던 스물한살 이경재 씨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불렀어. 차에는 경재 씨를 포함해 건장한 남자 11명이 타고 있었어. 이들은 서울 경찰청 소속 의경들이야. 다들 기분이 엄청 좋아. 왜냐? '경찰의 날'이었던 이날, 그동안 모범을 보였다고 이 11명이 표창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거든.

그 시각, 삼성동의 한 아파트 앞에는 르망 한 대가 서 있었어. 르망은 80년대 중반에 정말 잘 나가던 국민자동차야. 서른 일곱살의 김선생님은 다가오는 르망을 확인하고, 철컥 문을 열었어. 차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이 김선생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어. 이 차에 탄 4명은 모두 같은 학교 선생님들로, 2년째 같이 카풀해서 학교에 출근을 해왔어. 김선생님을 태운 르망은 그렇게 학교로 출발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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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또 다른 곳, 고2 윤아는 아빠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중이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윤아는 꿈이 화가야. 어제도 그림을 그리다가 늦게 잠들었는데, 아빠가 출근길에 정류장까지 태워준다고 한 거야. 그런데 차 안 분위기가 이상해. 윤아도 아빠도 둘 다 말이 없어. 사실 아빠랑 윤아는 며칠 전에 싸워서 아직 냉전 중이야. 결국 서로 한마디도 안 하고 정류장에 도착했어. 윤아는 아빠한테 눈길도 안 주고 차에서 내려, 16번 버스를 기다렸어. 그리고 아빠차는 그대로 출발했어.

같은 시각, 늦잠을 잔 고등학교 3학년 승원이는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집에서 뛰어나왔어. 바로 이 친구야, 당시 19세 정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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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코 앞이라 맨날 잠이 부족해. 승원이는 세수만 겨우 하고 허둥지둥 달려 나왔어. 그런데 등 뒤에서 익숙한 버스 소리가 들려. 저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야. 승원이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어.

오전 7시 30분. 의경들이 탄 승합차, 선생님들이 탄 르망, 그리고 16번 버스.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탄 차량들이 모두 한강 다리로 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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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승합차 맨 앞에 탔던 의경 경재 씨가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멈췄어. 이상한 소리가 들렸거든. 돌 같은 게 차량 앞 유리에 막 튀어. 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차가 뒤로 확 쏠리는 느낌이 나고 도로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와. 잠시 후, 쿵! 소리가 들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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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부터 기억이 없으니까. 그게 굉장히 짧아요. 5분, 10분 그런게 아니라, 한순간이에요. 차에서 내려서 보니까 다 물이에요. 위를 쳐다보니까 사람들이 조그마하더라고요. 내리니까, (의경) 애들도 놀란 거죠. 여기가 어디냐. 지금 우리가 떨어진 거 같다…"
-이경재 씨, 당시 의경

차가 한강으로 떨어진 거야. 그것도 달리던 도로와 함께. 이 사고 뭔지 알겠어? 멀쩡하던 다리가 한순간에 끊어진 최악의 참사. 바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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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다리, 아비규환의 현장

"오늘 오전 7시 반쯤에, 성수대교 중간 부분 약 30여 미터가 통째로 끊어지면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출근길 차량으로 극심한 정체를 이루던 성수대교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교각 상판이 완전히 주저앉았습니다."

-당시 보도된 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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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를 눈 앞에서 실제로 본 사람들은 난리가 났어. 다들 놀라서 신고하기에 바빠. 사고가 접수되고, 인근 소방서 경찰 군인까지 모두 출동했어. 이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들은, 북한군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했대. 일부러 폭파한 게 아니고서야, 멀쩡한 다리가 무너진다는 게 말이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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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는 성수동이랑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다리야. 사고가 난 건 다리의 남쪽, 교각 10번과 11번 사이. 이 부분이 칼로 잘라낸 것처럼 끊어졌어. 떨어진 상판의 크기는 가로 19미터, 세로 48미터야. 이 정도면 농구장 2개 크기래.

강으로 떨어진 상판 위에는 차 4대가 있었어. 의경들이 탄 파란 승합차, 검정색 자동차 2대, 그리고 16번 버스. 떨어진 차들은 어떤 상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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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의경들이 탄 파란색 승합차와 그 옆에 검정색 프라이드는 비교적 멀쩡했어. 상판과 동시에 떨어져 충격이 덜했거든. 이 차에 탄 분들은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어. 그리고 상판 끝 쪽에는, 검정색 세피아가 있어. 상판이 분리되면서 튀어나온 철근에 차가 걸렸어. 만약 이 철근이 없었다면 차는 그대로 물에 빠졌을 거야. 아슬아슬하게 상판 위에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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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6번 버스. 이 버스는 뒤집힌 채 떨어졌어. 16번 버스는 압구정동 방향에서 행당동 쪽으로 가고 있었어. 아침이라 출근하던 회사원, 퇴근하던 경비원, 등교하는 학생들로 승객이 많았어. 무학여고 쪽으로 가는 버스였거든. 하필 다리가 무너지던 그 순간, 16번 버스는 끊어진 구간을 넘고 있었어. 처음 상판이 떨어질 때 버스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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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뒷바퀴 쪽이 끊어진 다리 끝에 걸렸어. 버스는 엔진이 뒤쪽에 있어서 뒤가 더 무거워. 갑자기 버스가 뒤쪽으로 확 기울면서 그대로 차체가 들리더니, 그대로 반바퀴를 돌아 20미터 아래로 추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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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도착한 대원들은 엄청 당황했어. 소방차들의 출동 위치는 무너진 다리 위였어. 구조를 하려면 저 20미터 아래, 한강으로 내려가야 해. 다리 위가 아니라, 배를 타고 무너지 상판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야. 구조대는 급히 한강공원 쪽으로 차를 돌렸어.

그 시각 상판 위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야. 특히 상판 끝에 걸려있는 검정 세피아는 물에 빠지기 직전이야. 세피아에 탄 사람은 33세 기몽서 씨. 큰 덤프트럭 뒤를 달리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주변이 다 물이더래. 무슨 일인가 주위를 둘려보는데, 양쪽에 뾰족한 철근이 눈 앞에 있어. 여기서 나가야해. 운전석은 철근이 막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조수석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어. 바로 그때, 덜컹. 차가 앞으로 확 기울더니, 강물이 차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해. 몽서 씨는 다급하게 조수석 문을 여는데, 안 열려. 필사적으로 조수석 창문을 깨고,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어. 창문 밖으로 더듬더듬 발을 디뎌보니까, 다행히 딱딱한 바닥이 느껴져.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거야. 몽서 씨는 그대로 상판에 주저 앉았어.

같은 시각, 강 쪽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외침이 들려. 저 쪽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카풀로 출근하던 르망 자동차의 김선생님, 박선생님이야. 떨어진 상판 위에는 르망이 없었는데? 르망은 다리가 무너지면서, 그대로 물에 빠진 거야. 그래도 두 사람은 깨진 창문으로 차에서 나왔어. 문제는 그때부터야. 비가 와서 물살이 너무 세. 몸이 강물에 계속 휩쓸려 내려가서 버틸 수가 없어.

이 때, 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어. 상판이랑 같이 떨어진 승합차와 프라이드. 두 차에 탄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선생님들을 발견했어.

"전 이마 쪽에만 상처가 있고 나머진 다치지 않았으니까. 내려서 보니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하니까. 그냥 사람들을 구해야겠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 들리고, 물에 떠내려간 분들이 살려달라 그러고. 그래서 모든 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이경재 씨, 당시 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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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어 타이어를 꺼내 던져주기도 했고, 고무줄 같은 걸 빼서 연결하기도 했어. 의경 하나가 주저 없이 강물로 몸을 던지자 또 다른 의경 하나도 따라서 강물로 들어갔어. 의경들은 단숨에 선생님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 이들을 구했어. 그런데 르망에 타고 있던 선생님들은 4명이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2명은 보이지가 않아.

그 때 또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려. 16번 버스 쪽이야. 버스 주변으로 의자며 번호판이며 다 떨어져 나왔어. 가까이 가보니,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얼마나 찌그러졌는지, 버스 높이가 허리춤까지 밖에 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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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씨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허리를 숙여 버스 안쪽을 살펴봤어. 현장은 너무 참혹했어.

"(버스 밖으로) 피가 흥건하게 나와 있었고. 사람 위에 사람이, 겹겹이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죠."
-이경재 씨, 당시 의경

▲ 32명의 무고한 희생자

살려달라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람들을 꺼내기 시작했어. 의식 있는 사람부터 하나 둘 꺼내는데, 다들 춥다고 말했어. 피를 많이 흘려서 체온이 계속 떨어지는 거야. 그래서 구조에 나선 사람들은 자기 옷을 벗어서 부상자들에게 덮어줬어. 차에 있는 시트 커버까지 뜯어서 덮었어. 하지만 비까지 오니, 부상자들은 상판 위에 누워 그 찬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있었어.

구조된 사람들은,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을 챙겼어. "전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그렇게 부상자들을 상판에 올려놓고 다시 버스로 향했어. 근데, 다른 사람을 구하고 오면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들이 의식이 없어. 부상자들은 차가운 상판에서 의식을 잃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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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리라고 금방 구조대 올 거라고. 조금만 참으라고 얘기를 하려고 했더니.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더라고요."
-이경재 씨, 당시 의경

이 상황은 뉴스속보로 생중계 됐어. 도로 위에서 벌어진 사고라, 누가 그 시간에 거기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우리 아이가 학교에 잘 갔는지, 남편이 회사에 잘 출근했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빗발쳤어. 이때 서울시내 통화량이 급증했대.

이 소식이 전해지고, 특히 침통해진 곳이 있어. 16번 버스가 서는 무학여고야. 반마다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확인해 아직 안 온 학생 명단을 정리했어. 그 명단에, 지각해서 뛰어가던 승원이도 있었어. 그리고 아빠차로 정류장에 내렸던 윤아도. 두 사람 모두, 아직 학교에 오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교실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어. 승원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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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그날따라 유독 안 와서, 제가 심하게 지각한다고 생각하고 등교했거든요. 버스를 탔는데 성수대교로 갈 수 없다고 하셔서 당황했는데. 동호대교로 건너 등교했었거든요. 막상 보니까, 한강 위에 자세히는 안보이는데 다리가 끊어질 걸 보면서 등교했어요."
-정승원 씨, 당시 19세

그날 승원이는 전속력으로 뛰었지만 버스에 타질 못 했어. 앞차를 놓치고 한참만에 버스를 탔는데, 그 차에서 무너진 성수대교를 본 거야.

"교실로 뛰어갔는데, 다 우는 분위기였어요. 안 왔으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 교실에서 뉴스를 틀어놓고 있었고. 엄마도 너무 놀라셔서…"
-정승원 씨, 당시 19세

승원이만 생각하면 너무 다행인데, 떨어진 버스에는 2학년 윤아가 타고 있었어. 많은 운명이, 그날 그렇게 간발의 차로 갈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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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발생 30분 뒤, 드디어 구조대를 태운 보트가 상판에 도착했어. 그 시각이 오전 8시 10분. 상판 위에 구조된 사람들부터 살피는데,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들것과 헬기를 동원해 사람들을 쉴새 없이 실어 나르는데, 대부분이 시신이었어. 이미 사망했거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야.

"가방부터 개인 소지품들이 버스 안에 그대로 널려있고. 피도 바닥에 많았고. 현장을 여러군데 봤지만, 참혹했죠."
-심재천, 당시 중부소방서 구조대장

버스에 탄 사람들 중에는 의식이 또렷한 사람도 있었어. 납작해진 버스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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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내리는 문이 있는 버스 뒤쪽에 있었어. 뒷문에 있던 기둥이 지지대 역할을 하면서, 그 쪽이 덜 찌그러진거야.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기적적으로 버스에서 살아 남았어.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본격적인 버스 수색이 시작되고, 아무리 버스 안에 외쳐봐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

강물 수색도 계속 됐어. 혹시 실종자가 더 있을까봐. 전문 잠수부와 해군 병력이 투입돼서 강 밑을 샅샅이 살폈어. 가라앉은 르망을 발견하고 차를 끌어 올렸어. 차 안에선 두 선생님이 시신으로 발견됐어. 끝내 차에서 나오지 못 한거야. 잠시 후, 또 다른 차량이 발견됐어. 여기도 운전자가 사망한 채로 그대로 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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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일동안 더 수색했는데 더 이상 발견된 사람은 없었어. 이번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는 총 32명, 생존자는 17명이었어. 16번 버스에서만 29명이 사망했어. 버스 탑승자는 총 31명이었는데,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사망한 거야. 무학여중, 여고 학생만 9명이 희생됐어.

▲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

학교에 가겠다고, 회사에 출근한다고 집을 떠난 소중한 가족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어. 그 마음이 어땠을까. 김양수 씨는 이 사고로 29살 막냇동생 김광수 씨를 떠나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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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 자리에서 푹 주저앉아 있었죠. 계속 방송에 나왔잖아요. 사망자 명단이 나오고. 먼저 알고 계시더라고요, 어머니 아버지가. 그래서 바로 택시 타고… 어머니 아버지 오셔서 그냥, 땅을 치면서 동생 이름, 광수야 광수야 하는데…"

-故김광수 씨 형 김양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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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타까운 건 이 사고가 나던 날이, 동생의 마지막 출근길이었대. 동생 광수씨가, 얼마전에 회계사 1차 시험에 붙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생각에 회사를 퇴사하기로 한 거야.

하루 아침에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엔 윤아 아버지도 계셨어. 사고가 있기 전에 딸이랑 싸워 어색했잖아. 사실, 그때 윤아 아버지가 매를 들었었대. 근데 그게, 딸과의 마지막 기억이 됐어. 그리고 아버지에겐 피 묻은 윤아의 가방이 전해졌어.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어본 아버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오열했어. 가방에 윤아의 편지가 들어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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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 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백배 천배나 더 마음 아팠을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빠, 저를 때린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제 속에 있던 나쁜 걸 때렸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정말로 제 마음이 아픈 만큼이나 저도 정말로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 꼭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아빠도 파이팅! 아빠를 사랑하는 윤아가 드려요. 1994년 10월 20일."
-윤아의 마지막 편지 中

성수대교 붕괴 참사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 서른 두 명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어. 그 시간에 성수대교를 건너고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 성수대교 붕괴의 이유

이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어. 매일 성수대교와 관련된 뉴스가 쏟아졌어. 성수대교는 도대체 왜, 무너졌을까.

성수대교는 지어진 지 15년 밖에 안된 다리야. 성수대교가 시공되던 때는 1977년.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좀 살만해 지던 시기, 그때 마침 짓게 된 다리가 바로 이 성수대교였어. 그러다 보니 좀 더 화려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획기적으로 보이게 짓고 싶어 했어.

그래서 선택한 공법이 '게르버 트러스 공법'이었어. 철강재를 삼각형 형태로 엮어 교각 위에 얹는 방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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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에 쓰인 이 삼각형 구조물들을 트러스라고 해. 딱 봐도 화려하지. 근데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야. 트러스는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해. 보통의 다리는 여러 개의 기둥으로 하중을 버티도록 설계하는데, 트러스가 있으면 기둥을 많이 안 세워도 돼. 그래서 다른 다리들에 비해 성수대교는 기둥 간격이 넓은 편이야. 양화대교는 기둥 간격이 35미터인데, 성수대교는 120미터나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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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의 위쪽 트러스를 먼저 만들고, 나머지 트러스를 그 위에 끼워 넣어, 연결해 붙이는 거야. 그래서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접합'이야. 미리 설치한 트러스와 나중에 끼우는 트러스를 연결하는 부분. 차가 지나갈 때 이 부분으로 하중이 전달되니까, 특히 신경써서 만들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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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수대교가 끊어진 단면을 보면, 종이처럼 찢어지고 휘어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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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어처구니 없지만, 이번 사고의 원인은 '용접 부실'이었어. 이건 용접한 면의 모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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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두개가 비슷해 보이지만 덮개를 열면, 하나는 용접재가 꽉 차있고 다른 하나는 가운데가 텅 비어있어. 당연히 가득 차 있는게 튼튼하겠지. 이렇게 용접해야 힘을 받아도 뒤틀림이 없어. 그런데 성수대교는, 도면상에는 꽉 차게 용접한다 해놓고, 실제로는 제대로 안 한거야.

이렇게 시공한 이유는 시간을 단축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서. 애초에 부실공사였던 거야. 설마 다리가 무너지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겠지. 이건 당연히 시공사의 잘못이야. 성수대교를 만든 회사는 동아건설이야.

동아건설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건설회사 중 하나야. '리비아의 기적'이라고, 사막에 물을 끌어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배수로 공사를 한 게 동아건설의 최원석 회장이었어. 성수대교 사고 당일, 최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고 현장을 찾았어.

"동아가 책임이 있다면 모든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 당일 최원석 회장

최 회장은 며칠 후 기자회견도 열어서 "성수대교 시공사로서의 동아의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는 뜻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저희 동아는 거듭 태어나겠습니다"라고 말했어. 그런데 검찰 조사가 시작되며 태도가 싹 바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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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도 없이 성수대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불량 시공을 지시했으면 성수대교를 다녔겠습니까?"
-1994년 11월 8일 검찰 출두 당시 최원석 회장

동아건설은 시공사가 법적으로 책임을 지는 기한이 5년인데, 15년이 지났으니 법적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어. 그러면서 화살을 서울시로 돌렸어. 서울시의 관리부실 책임 아니냐면서. 그럼 서울시는 왜 다리가 무너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서울시 교량의 관리 주체는, 서울시야. 그래서 시에서는 의무적으로 해마다 시설물 안전점검을 해. 특히 1992년부터는 대대적으로 노후 구조물 안전진단을 실시했어. 이때는 성수대교에 문제가 없었을까? 사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가 없어. 왜? 성수대교는 진단도 안했거든. 성수대교는 지은지 20년이 안 돼 애초에 검사 대상에서 제외됐어. 그 사이 성수대교에는 엄청난 위험이 찾아왔어.

1979년에 성수대교를 설계할 당시에는 하루 통행량을 5만대 정도로 예상했는데, 1994년 하루 통행량은 10만대 이상이었어. 무려 2배야. 다리에는 점점 무리가 가고, 차도 매일 막혀. 서울시는 이 상황을 몰랐을까? 이번엔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름 대책도 세웠어. 그 대책은? 성수대교를 왕복 5차선으로 확장하는 것. 서울시는 늘어난 교통량을 차로를 늘려 해결하려 한 거야. 얼마나 사태 파악을 못했으면 이런 계획을 세웠을까.

더 황당한 건, 사실 성수대교의 붕괴 신호는 여러 번 있었어.

"어젯밤(사고당일) 12시 20분 경에 성수대교 사고 지점쯤 왔을 때 철판이 깔린 것 같아요."
-붕괴 당일 성수대교 이상 감지한 남 모씨
"시간은 새벽 2시 반이었고요. 4번째 교량쯤 되는데요. 간격이 다른 데 간격보다 좀 이상하더라고요."
-붕괴 당일 성수대교 이상 감지 이 모씨

사고 당일 새벽부터 도로 위에 커다란 철판이 깔려 있었대. 사고 전날 이 다리 이음새 부분이 벌어진 거 같다고 누군가 신고를 한 거야. 신고를 들은 서울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철판을 더 깔아놨대. 안 보이게.

그뿐만이 아니야. 사고가 나기 1시간 전에 또 제보가 왔어. 다리를 지나던 운전자가 새벽 6시쯤 성수대교를 건너는데, 덜컹하는 다리 중간에서 충격을 느꼈다는 거야. 이미 그 때부터 다리에 금이 가고 있었던 거야. 이 신고 내용은 바로 서울시로 전달이 됐어. 그런데 바로 보수작업이 이뤄지지 않았어. 비가 와서. 비가 그치면 그때 보수하려고 했대. 그때만 통제를 했어도, 이런 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 '인재'였던 사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부실공사를 한 시공사 동아건설, 관리감독을 안한 서울시. 이들은 서로 책임을 떠 넘기기에 바빴어. 검찰은 동아건설과 서울시 양쪽을 모두 기소했어. 기소된 피고인은 총 17명. 재판부는 양쪽에 다 유죄를 판결했지만, 형량은 전부 집행유예가 나왔어. 모두가 석방된 거야. 그 당시 법에 따르면, 시공에 문제가 있을 때 처벌할 규정이 '면허 취소' 밖에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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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가족은 물론이고 전 국민이 분노에 휩싸였어. 그래서일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어. 담당공무원과 동아건설 관계자 총 3명에게 과실치사죄로 1년 6개월에서 2년형이 내려졌어. 이게 당시로서는 부실시공에 경종을 울리는 중형이었대.

처벌은 미흡했지만, 사고 이후에 달라진 것들이 있어. 먼저 시설물 안전과 유지관리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됐어. 또 한국시설안전공단이 이 때 처음 설립됐어. 그리고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도 강화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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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원인 백서. 사고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서 백서를 만들었어. 이 백서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발행일이 1995년 6월 30일 발행이야. 백서는 하루 전인 6월 29일에 완성됐어. 그런데 그 날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날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끔, 이 백서를 만들고 있는 과정에서 이번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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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는 전면 재건축이 결정됐어. 그리고 1997년 7월 3일, 재개통식이 열렸어. 현장엔 사고 유가족들이 초청됐어. 소중한 가족을 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유가족들을 오열하며 목 놓아 이름을 외쳤어.

꼬꼬무

"한동안은 사실 성수대교 근처도 못 갔어요. 막 울음이 북받쳐서…다음엔 다리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말고, (동생은) 희생됐지만, 강처럼 바다처럼 넓은 데서 그동안 못 펼친 걸 펼치고. 그곳에선 건강히 지내라고 빌었죠."
-故김광수 씨 형 김양수 씨

사고가 난지 넉달 후인 1995년 2월, 무학여고에서는 졸업식이 열렸어. 3학년 2반 교실에는 노란 튤립을 든 어떤 남자가 앉아있어. 바로, 사고 희생자 중 유일한 3학년이었던, 혜주의 아버지야. 이날 딸을 대신해 아버지가 졸업장을 받았어. 졸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던 아버지는 꺼이 꺼이 울었어. 그리고 성수대교로 가셨어. 딸이 세상을 떠난 후, 딸 생각이 날 때마다 늘 그 곳으로 가셨대.

꼬꼬무

그리고 4년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는 딸이 떠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셨어. 평소 이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을 굉장히 많이 하셨대. 다른 가족들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 자꾸 이런 생각에 잠기는 거야. '학교 늦은 애한테 사과만 깎아주지 않았어도', '남편한테 밥만 챙겨주지 않았어도', '괜히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 라는, 그런 원망과 자책들. 자꾸 자기 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야.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은 생존자라는 걸 최대한 숨기고 산대.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이 든다는 거야.

꼬꼬무
꼬꼬무
꼬꼬무

성수대교가 보이는 곳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어. 이 곳에서 매년 추모식이 열려. 그 곳엔 해마다 현수막이 걸려. '세상이 다 잊어도 엄마는 잊지 않으마', '엄마는 여전히 기억하고. 아직도 사랑해' 등의 문구와 함께.

이번 취재를 하면서, 한 유가족이 '꼬꼬무'에 이런 말을 했대. 희생자가 수백명이나 되는 사고가 많다 보니, 이 32명의 희생자는 적게 보이지 않냐고. 그래서 잊혀지는 거 같다고. 중요한 건 희생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잘못으로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 이걸 '생존환상'이라고 한대. 나와 내 가족은 안전할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야.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명백한 인재이고, 안일한 생각으로 이런 참사는 계속 되풀이 되고 있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꼬꼬무

"저도 당해보니까 이게 남일이 아니더라고요. 항상 내가 하는 일에 완벽하면, 우리 가족, 남, 사고 날 일이 없잖아요."
-故김광수 씨 형 김양수 씨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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