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장사 상륙작전, 전쟁 44년만 첫 유해 발굴…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2.06.24 03:51 수정 2022.06.28 01:59 조회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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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은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2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작전명령 174호 -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이라는 부제로 장사 상륙작전을 조명했다.

지난 1950년 9월 700명이 넘는 군인들이 부산항에 모였다. 그런데 이들은 보통의 군인들과 달랐다. 이들은 군번줄조차 없는 학도병이었던 것.

이들은 군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격 대원증을 인민군 군복에 숨기고 배에 올랐다. 이들이 탄 배는 문산호. 그리고 해맑은 아이들과 달리 이 배의 지휘관 이명흠 대위는 걱정 어린 눈으로 학도병들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학도병들을 데리고 북한이 점령한 적진에 침투해 200 고지를 탈환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던 것. 총을 잡은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학도병들을 작전에 투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상부는 이 대위의 이야기를 묵살했고 700여 명의 학도병을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대위의 걱정과 달리 작전 개시 12시간 만에 200 고지를 탈환했고 보급로까지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학도병들은 곳곳에 쓰러진 친구들의 시신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학도병들은 장사리 마을 반대표 고지까지 모두 접수했고, 이에 북한의 관심도 장사리에 쏠렸다. 그리고 북한은 병력을 총동원해 장사리로 향했다.

이에 학도병들은 급히 장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명흠 대위는 미군에 구조 요청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에서 구조선을 보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구조선 도착 장소는 장사리 해안, 학도병들은 이미 장사리를 떠나 남하하고 있었고 장사리는 북한군이 이미 재점령한 상황이라 적진으로 다시 침투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구조선을 향해 간 학도병. 학도병들이 구조선에 승선하려던 그때 북한군의 총격이 이어졌다. 이에 유엔군도 지원 사격했다. 그 와중에 학도병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구조선으로 향하는 중 곳곳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이들이 있었지만 학도병들은 친구들을 도울 수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갔다. 겨우 구조선에 올라 살았다고 안도하던 그때 구조선 정중앙에 박격포가 떨어졌다.

이에 8명의 학도병이 전사했고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에 미군은 곧바로 구조선의 문을 닫고 출발하고자 했다. 이 대위는 미군 소령을 가로막고 아이들을 태워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의 애원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미군 소령은 밧줄을 잘라 배를 출항시켰고 구조선을 향해 헤엄쳐오던 소년들은 실망감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구조선도 눈물바다였다. 구조선에 동료들이 탈 수 있도록 방어했던 이들이 미처 배에 오르지 못했던 것.

그렇게 장사리에 남겨진 소년들은 30여 명. 아이들은 북한군을 피해 풀숲에 숨었다. 그러나 곧 북한군에 발각되어 포로가 된 것.

북한군은 학도병들에게 인민군이 되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인천 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자 전세가 역전되었고 북한군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북한군들은 북한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포로가 된 소년들은 열흘 낮밤을 계속 걸어 북한군들에게 끌려갔다. 그러다 힘들어서 쓰러지면 북한군은 총알도 아깝다며 대창으로 아이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 포로로 남겨졌던 대환이는 고향 친구 진목이와 함께 탈출을 감행했고, 우연히 만난 군인들에게 인민군복에 숨겨뒀던 유격대 원증을 내보이며 도와달라 외쳤다. 그렇게 자유가 된 아이들. 하지만 대환이와 진목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투에 다시 나섰다. 구조선을 타고 구조된 학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떠난 지 3년만 휴전이 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가족들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대환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함께했던 고향 친구 진목이가 전쟁터에서 사망했던 것. 이메 대환이는 친구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장사 상륙작전. 그러나 이곳에서 전사한 소년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139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추정치일 뿐이고 애초에 참여한 인원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이는 그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에 작전 지휘관 이명흠 대위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기록을 찾아 나섰다. 그는 군복을 벗고 대원들의 행방 찾아 30년을 꼬박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그는 미완의 명단을 남겼다.

그리고 유해가 발견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이다. 좌초된 문산호는 그대로 방치해 훼손됐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1991년 처음으로 문산호의 탐사가 진행됐는데 이는 장사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대원들이 방송국에 의뢰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가 유해 발굴에 나선 것은 1997년이 처음이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난 지 44년 만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22년, 또다시 발굴을 시도했다. 생존 대원들의 간절한 요청에 따른 발굴이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청춘들의 희생을 모른 것을 안타까워하며 희생된 소년들 중 한 명이라도 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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