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스타 끝장 인터뷰

[스브수다] "원더풀한 해석"…'미나리' 한예리의 연기 디자인

김지혜 기자 작성 2021.03.14 16:33 수정 2021.05.10 11:09 조회 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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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리

[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아이고...엄마한테 우리 사는 꼴 다 보이네"

예상보다 더 느릿하고 슴슴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였다. '별거 없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이 대사가 흐르는 장면에서 눈물이 고이고야 말았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데이빗(앨런 김), 앤(노엘 조) 네 가족의 삶에 '순자'(윤여정)라는 선물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날아온 타지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을 터. 적어도 딸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 멋쩍은 듯 건넨 첫마디가 '아이고~'라는 감탄사였다.

미국 영화인 '미나리'에서 한국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감정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아웅다웅한 대화들, 어린 시절 외갓집을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아이고~'라는 대사는 대본에는 없었고 배우가 추가한 표현이었다.

미나리

배우 한예리는 '모니카'라는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연기라는 것이 결국 감정의 전달이고 분위기의 환기라면 한예리가 연기한 모니카는 이 가족을 삶을 타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는 번역이 완전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감독님 부모님 세대인 제이콥과 모니카의 이야기가 제 부모님 이야기처럼 와 닿더라고요. 모니카는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많이 가진 캐릭터라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배우가 연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못하게 되더라도 꼭 한국 배우를 추천해주려고 했어요."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정확히는 이민 1세대인 감독 부모님의 이야기다. 정이삭 감독이 데이빗 나이였을 무렵,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스티븐 연과 한예리가 생생하게 살려냈다.

정이삭 감독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미국인이다. '미나리'는 한국어 대사가 7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어가 서툰 정이삭 감독의 시나리오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가 많았다. 번역된 시나리오라 하더라도 문어체 대사의 딱딱함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한예리

배우들은 직감적으로 이 대사에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윤여정과 한예리는 미국으로 넘어가 에어비앤비에 머물며 우리의 정서를 대사 곳곳에 채워 넣었다.

윤여정이 극 중간에 등장하는 데에 반해 한예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다. 제이콥 가족의 중심축이자 네 배우 사이에서도 중심 역할을 해야 했다. 낯선 촬영장만큼 어려웠을 캐릭터 디자인은 어떻게 해냈을까.

"요즘은 모르겠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부모님이 아이 앞에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때의 기억에서 엄마의 표정을 생각했죠. 감정을 참으면서 지었던 눈빛이나 입매...조금조금씩 제가 기억하는 어떤 것들을 표현해내려고 했어요. 특히 제이콥과 모니카는 어렸을 때 결혼을 했고, 이민을 왔잖아요. 모니카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키우는데 경제적 기반도 없는 데다 아이가 아프고 또 낯선 곳에서 생활을 해야 하니 남편과 더 많은 트러블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환경을 상상하며 연기했어요."

제이콥을 향한 모니카의 사랑은 자식들을 향한 사랑에 비해 부각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예리는 모니카를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으며 특히 '제이콥을 향한 사랑'에 중점을 뒀다고 했다.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독님이 어머니 사진을 갖고 오거나 하진 않았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의 부부싸움 이야기를 나누고, 그때 아빠 엄마의 표정 그리고 우리가 느꼈을 불안함 같은 걸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모니카가 이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제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제이콥과의 관계였어요. '모니카는 왜 그의 옆에 있고,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모니카가 원하는 건 뭘까'를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에너지는 사랑이더라고요. 그게 뿌리가 돼 이 가정을 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보다 가정의 해산을 원하지 않아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이들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기르고 싶었겠죠. 무엇보다 모니카가 제이콥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한예리

실제로 정이삭 감독의 아버지는 '미나리'를 본 후 "아내가 날 이렇게 사랑한 지 이제야 알았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한예리의 모니카가 표현해낸 남편을 향한 사랑이 이야기의 실존 인물에게도 가닿은 것이다.

영화 속 모니카와 순자의 관계처럼 한예리와 윤여정은 카메라 밖에서도 깊숙하게 소통했다.

"25회 차에 촬영을 마쳤는데 예산이 여의치 않기도 해서 에어비앤비로 집을 구해서 윤여정 선생님과 피디님, 피디님의 조카, 저 이렇게 같이 지냈어요. 그렇게 지낸 게 다행이었죠. 호텔에서 지냈으면 이렇게 빨리 친해지거나 깊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진 못했을 것 같아요.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때 모여 다 같이 밥 먹고 매일매일 식사했던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나네요."

윤여정은 1970~80년대에 미국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시대를 몸으로 체화한 만큼 동시기 속 모니카의 감정을 이해할 여지가 많았을 터. 한예리는 윤여정의 경험을 귀에 담고 연기에 투영했다.

"선생님 말로는 그 당시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갈 때는 다시 가족과 못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본인께서도 떠나올 때 많은 결심을 하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한예리

모니카와 순자의 재회신에 대해서도 물었다. 한예리는 '아이고'라는 대사는 자신의 아이디어였으며, 평소 자주 쓰던 말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제가 '아이고'라는 말을 잘 써요. '이게 무슨 일이야' 싶을 때 쓰죠. 순자가 너무 먼 길을 왔고 그 험난한 길에 딸을 위해 짐을 이고 지고 온 것을 본 거잖아요. 엄마가 온 거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우니 그걸 표현할 한국적인 말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순자와 모니카를 이어주는 말 같은 거죠. 그래서 종전 대사에 '아이고'를 붙여서 대사를 쳤어요.

연기적으로 어려웠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모니카와 제이콥의 주차장 말다툼 신이었다. 이 장면에서의 모니카의 감정 변화는 관객 입장에서도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복잡 다단해 보이는 모니카의 내면을 한예리는 어떤 의도와 의미를 담아서 연기했을까.

"모니카는 병원에서 제이콥을 한번 붙잡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죠.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내게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충격이 클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식료품에서의 제이콥의 모습을 보고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배우 한예리는 울고 있었지만, 모니카는 울면 안 되잖아요. 자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니까....모니카는 제이콥에게 끝을 내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힘든 것도 이렇게 표현해서 강한 사람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나리

'미나리'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이 한발 더 다가갔다. 한예리는 이에 대해 "선물 같은 소식"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미나리'를 통해 "위로받았다"는 관객들의 평가가 더 행복하다고 전했다.

"미국에 살아보거나 이민을 간 적도 없기에 '미나리'가 얼마나 감동을 주고 울리는 이야긴지는 몰랐어요. 많은 분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해서 참여한 배우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가족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가족과 소통의 부재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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